인간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어쩌면 우리는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이 물리적 폭력이나 인식의 폭력으로 재단되고 구획되고 양극화되고 있다. 진작부터 우리가 세련된 문명이라고 믿었던 것이 결국 야만성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리고 지극히 이성적인 존재라고 믿었던 인간이 끝내 비이성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미세한 차이와 균열은 거대한 동일성으로 수렴되어 버리거니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은 옳다고 믿는 불가능성으로 수렴되어 버린다.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을 예외적인 존재로 승인하려는 전제 아래 자기 자신을 자아라는 견고한 성곽에 유폐시킨 결과가 아닌가. 그러니 우리는 바야흐로 그동안 공들여 세공해온 인간적인 것의 본질에 대해 되물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이에 관해 캐나다의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의 작업은 우리의 마음에 잔잔하면서도 강력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무려 4년 동안 아마존강 유역에 사는 원주민들과 생활한 경험을 토대로 숲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섬세하면서도 풍요로운 관찰 결과를 제출한 바 있다. 바로 인간적인 것의 바깥에 배척한 비인간 또한 정교한 기호 작용을 통해 역동적인 생명 활동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자명하다고 믿는 인간적인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지 않은 것과 연결되어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때 그가 든 흥미로운 사례로 ‘인간적이지 않은’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던진 질문은 인간적인 것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재고하도록 하거니와 특히 질문에 등장하는 지팡이는 인간적인 것의 지반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지팡이와 같이 우리를 지탱하는 세계가 오히려 우리를 구성한다는 진실을 드러내니까 말이다(에두아르도 콘, 차은정 옮김,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 책, 2018).이처럼 우리가 한 인류학자의 작업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되려 인간적인 것의 범주와 좌표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사실 이는 문학에 있어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시는 불분명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를 가상의 공간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 바깥에 있는 존재와 관계 맺게 함으로써 우리를 혼종적인 존재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는 인간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 사례로써 최근 간행된 김옥성 시인의 첫 시집 《도살된 황소를 위한 기도》를 들 수 있겠다. 이 시집에서 역시 인간은 경제성과 효율성으로 무장한 “거대 자본”을 앞세워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존재로 나타나거니와(〈천성산 화엄늪으로〉) 심지어 거대한 시스템을 통해 같은 인간을 집어삼키는 존재로 나타나 있다(〈풍랑몽―나는 식민지 청년처럼〉).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 시집을 통해 단순한 인간중심주의를 반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연결 고리를 탐색해보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내 형제들을 위한 섬김의 자세 참나무 참나무 참나무……참나무의 자잘한 이파리들이참된 나는 무(無),라고 경(經)을 외어준다그 경을 따라 외다 보면나무와 나의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겹친다나이테 속 깊은 곳에 가두어온반지 하나가 풀려나와하늘 끝까지 데굴데굴굴러가서는하얀 운판을 때린다그 소리 마음속 날벌레들 깨운다허공을 떠돌던 딱정벌레들날개 접고 둘러앉아전생의 숲에서 흘러나오는수액을 마시고 있다청동 날개마다형제들의 얼굴이 떠 있다― 김옥성, 〈참나무 경을 외는 시간〉, 《도살된 황소를 위한 기도》, 푸른사상, 2023김옥성 시인에게 자연은 “스승”이고 인간은 그에게서 세계의 진실을 배우는 “학생”과 같다. 평소 우리가 가진 인간 중심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자연은 평면적이고 지극히 보잘것없는 미물에 불과할지 모르겠으나, 그는 이러한 구도를 전도시켜 자연을 ‘배움’의 장으로 만들어놓는다. 이를테면, 우리가 나날이 맞이하는 “하루”는 치열한 삶의 자세와 새로운 삶을 향한 도약을 몸소 보여주는 스승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그는 뜨겁게 살다가 장엄한 죽음에 이르면서도 기꺼이 눈부신 다음 날을 맞이하니까 말이다(〈하루의 다비식〉). 또 등꽃과 나무는 얼마나 강인하면서 인자한 스승인가. “등꽃”은 어떠한 시련과 역경을 딛고서 자신만의 단단한 향기를 뿜어내는 존재이고(〈등꽃〉), 나무는 죽음 이후 목재가 되어 누군가의 삶의 일부를 이루는 존재이니까 말이다(〈그의 공방에서〉). 그러니 이들이 남긴 “뼈”는 치열한 삶의 증거임을 넘어 이 세계의 진실을 품고 있는 교과서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위의 시에서 그는 “참나무”를 통해 나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는 아득한 시간을 헤아리고 있다. 사실 그의 눈앞에 있는 참나무는 단독적인 존재라기보다는 그전까지 숱한 참나무들이 나고 자라고 죽음을 맞이한 시간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지금 여기에 한 인간이 살아있기 위해서는 그전까지 숱한 인간이 탄생하고 살아가고 죽음에 이른 시간이 축적되는 과정이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이런 점에서 참나무와 인간은 생명의 공통성을 가진 존재라고 볼 수 있겠으나, 두 존재의 영역 또한 뒤섞여온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참나무가 그간 여러 형식으로 인간 삶의 일부를 이뤄왔을 뿐만 아니라 인간 역시 흙이 되어 참나무 일부를 이룬 시간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 시에서는 참나무와 내가 동일한 존재가 되는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종교적 상상력에 의탁하고 있다. 바로 그것은 “경”, “반지”, “전생” 등의 시어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의 윤회론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이런 점에서 볼 때, 사실상 우리가 우월하다고 믿는 인간 존재는 어쩌면 유동적인 것에 불과하거니와 우리가 자명하다고 믿는 인간적인 것이란 임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관련하여 김옥성 시인은 인간에 관한 단일하고 고정된 인식을 허물어트리는 혼종적인 인간 이미지를 창조해내고 있다. 예컨대, 그가 만든 “바위 인간”은 우리가 아무리 인간을 사회적인 관점을 따라 구분해도 결국 공통적인 삶의 무게를 감당하다가 각자의 죽음에 이르게 되는 존재로 나타나 있다(〈바위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이슬 인간”은 우리가 아무리 경제적인 논리에 따라 이 세계를 철저하게 지배한다고 해도 결국 자기가 휘두른 칼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존재로 나타나 있다(〈이슬 인간〉). 그러니 우리가 이 세계에 풍요롭게 거주하기 위해서는 지구의 주인이라는 오만을 내려놓고 다른 존재를 섬기거나 그들과 공생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연결의 감각을 회복한 존재들의 음악바람에 휘어지는 빌딩 아래를걷다 보면배관들이 연주하는 금관악기의 노래를들을 수 있었어요느낄 수 있나요?63빌딩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게,자유의 여신상이 에펠탑에게,건너뛸 수 없는 거리에 붙박여 애태우는 연인들처럼건축물이 머언 건축물에게 전해주는내밀한 주파수를,신림동 높은 산동네 낮은 자취방에서자려고 누우면꿈결인 듯 물소리가 들려왔습니다누군가 수맥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 일러줬지만사실 나는 배관들과 공명하고 있었어요작은 돌멩이 하나도우주라서생명이 흐르는 혈관을 수없이 품고 있다고 해요그 뒤로 두근두근배관들의 심장에서 내 심장으로내 심장에서 건물의 심장으로맥박이 공명하는금관악기의 구슬픈 노래에 뒤척이는 밤마다아주 멀리 떨어진 건물들이 공명할 때면쇳소리 나는 생체 리듬이 허공으로 울려 퍼지며하늘을 찢었어요언젠가 양평 용문사에서 보았답니다천 년쯤 살면 나무도 한 채의 빌딩이어서은행나무 한 그루물관과 체관이 뒤엉키며 휘파람 소리로울고 있었어요구만육천오백 킬로미터의 긴 배관을 따라붉고 뜨거운강물이 끝없이 흘러가는내 육체 또한 한 채의 가옥이므로그 멜로디를 잘 기억해낼 수 있어요그게 정말 사랑이었을까요?― 김옥성, 〈배관공의 사랑〉, 《도살된 황소를 위한 기도》, 푸른사상, 2023이 시에서 시인은 인간을 비롯한 우주상의 모든 존재가 복잡하게 얽힌 배관을 품고 있는 “한 채의 빌딩”이라고 보고 있다. 그건 바로 하나의 존재가 역동적인 생명 활동을 펼쳐 보이는 여러 요소가 모인 것이고, 그 또한 다른 생명체들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유기체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 그가 수많은 빌딩이 솟아있는 거리를 거닌 일이었고, 그중에서도 그가 한 빌딩으로부터 바람이 울리는 배관의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물론 이는 단순한 금속성의 소리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숱한 배관이 보이지 않는 곳과 공명하여 빌딩 전체의 멜로디를 이루는 노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이러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에 잠시 머물렀던 자취방 건물과 공명한 기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직접적인 것은 “구만육천오백 킬로미터의 긴 배관”을 품고 있는 “내 육체”의 감각 때문이지 않았을까.바로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몸을 매개로 하여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길가에 떨어져 있는 “작은 돌멩이”와 같이 사소한 존재이기도 하고, “양평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와 같이 유구한 시간을 품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들은 각자 “생명이 흐르는 혈관을 수없이 품고” 자기만의 노래를 부르고 있거니와 “천 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을 넘어 자기의 노래를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몸속에서 울리는 멜로디를 통해 자기의 노래를 부르는 존재이며, 각자의 존재들 역시 하나의 멜로디를 이뤄 생태계와 우주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창조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이 멜로디에서 하나라도 빠지게 된다면, 생태계와 우주에서 조화로운 협화음보다는 조화롭지 못한 불협화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다른 존재들을 같은 생명으로 존중하고 섬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시인이 “내 육체”를 이른바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통로로 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그건 아주 작은 멜로디가 공명하여 상위의 화음을 이루고 결국 거대한 노래를 이룬다는 사실을 기억하겠다는 것, 바로 “내 육체”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다른 생명체를 향한 환대의 자세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라 결국 가장 근본적인 단계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어쩌면 우리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시인이 “제비가 돌아올 무렵” 피는 “제비꽃”을 보면서 오랫동안 접어둔 친구의 소식을 궁금해하는 것과 같이(〈약속〉), 생의 마지막 순간에 찬란한 “낙엽”을 보고서 인생의 아름다운 가을날을 위해 짙푸른 여름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같이(〈마흔아홉의 가을날에―시호(詩浩)에게〉).너이자 나를 위한 애도우리가 이 시집을 다 넘기고 났을 때 문득 인간적인 것이라는 명목으로 비인간적인 것을 향해 저지르는 횡포를 결코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날이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가차 없이 죽임을 당하는 저들이야말로 언젠가 전생에 짐승이었을 우리를 도살한 자들이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그러니 이 시집에서 시뻘건 비명을 삼키며 참혹한 죽음에 이른 그 누군가를 향한 애도는 너이면서 나를 향해 있기에 얼마나 서늘하면서도 애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어쩌면 나는 그가 전생에서 도살한 짐승이었는지도 모르지어쩌면 그는 내가 전생에서 도살한 짐승이었는지도 모르지어쩌면 그는 수천수만 번의 생 동안 수천수만 번 자신을 살해한 자들을도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아무도 알아선 안 되지― 김옥성, 〈도살된 황소를 위한 기도〉 중에서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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