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아에 가려진 슬픔의 능력
우리가 익히 들어봤을 법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n, B.C.423/427~348)은 서양철학사에서 상당히 악명 높은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자기의 사상을 집약한 개념으로 제출한 이데아(idea) 자체가 논쟁적인 지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플라톤은 세계를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로 이원화해서 바라보았다. 그에게 전자가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에 속해 있어서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이라면, 후자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차원에 속해 있어서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플라톤의 의도는 단순히 세계를 양분하려는 데 있다기보다 전자가 후자를 규정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 따라서 후자에 속한 우리가 전자를 인식하기 위한 이성적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었다. 그가 거론한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플라톤은 인간 존재를 “지하 동굴과 같은 거처”에 갇혀있는 죄수에 빗대고 있다. 그곳은 “불빛을 향해 길게 나 있는 입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입구는 “동굴 전체와 맞먹는 길이”로 보일 만큼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죄수들이 “불빛을 등진 채 오직 앞만 바라볼 수 있고 결박되어 있어 머리를 돌릴 수조차”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불과 그들 사이에는 “담이 세워진 길 하나가” 가로막고 있어서 그들은 전혀 뒤에 있을 불빛을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동굴 바깥에 있을 사물을 “동굴 벽면에 투영된 그림자”를 통해 인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그들이 진짜라고 본 것은 결국 사물의 허상에 불과한 것이고, 설혹 그들이 이 상황을 벗어난다고 해도 자신에게 익숙한 기존의 것을 “분명한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겠는가(플라톤, 박문재 옮김, 《국가》, 현대지성, 2023).
플라톤의 논리에 따른다면, 이 비유에서 지하 동굴은 현실 세계를, 동굴 바깥의 불빛은 이데아로 표상되는 이상 세계를 가리킨다. 그러면 인간 존재를 의미하는 죄수들은 그림자로 나타나는 현실 세계의 허상에서 벗어나 이것의 원인이 되는 동굴 바깥의 불빛을 지향해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플라톤이 인식의 방향 전환을 위해 인간이 지닌 고유한 능력을 탐색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 판단되지만, 사실 그는 이 세계를 지나치게 기술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감이 없지 않다. 마치 우리가 기술을 통해 그럴듯한 수많은 사본을 제작해낼 수 있으나 그것들이 결코 원본으로서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철학자가 국가의 통치자를, 그리고 잘 훈련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보조자를 맡을 수 있는 반면에, 불완전한 현실을 모방하는 예술가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지점에서 이 글은 다른 무엇보다 플라톤의 주장에서 눈부신 이데아로 인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슬픔이 가려져 버렸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니, 그의 논리대로 슬픔은 원본과 사본의 우열을 가릴 수 없거니와, 오히려 사본으로 되는 과정에서 그것은 더 고귀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 말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슬픔은 불확실한 이 세계를 거주할 때 주어지는 확실한 징표이자 유한한 인간이 모호한 타자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례로 이제 하나의 역사가 되어버린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명반 《가장 보통의 존재》를 들 수 있겠다. 여기에 등장하는 ‘가장 보통의 존재’ 또한 이별로 인해 이 세계에 온 “평범한 신분”의 존재이면서 머나먼 별빛 같은 ‘너’를 마음에 품은 존재로 나타나니까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앨범에 담긴 노래를 통해 ‘가장 보통의 존재’에게 특별한 삶을 선사하는 슬픔의 능력을 살펴볼 법하다. 슬픔에 내맡기는 사랑의 여정그대의 익숙함이 항상 미쳐버릴 듯이 난 힘들어당신은 내 귓가에 소근대길 멈추지 않지만하고 싶은 말이 없어질 때까지 난 기다려그 어떤 말도 이젠 우릴 스쳐가앞서간 나의 모습 뒤로 너는 미련 품고 서 있어언젠가 내가 먼저 너의 맘속에 들어가하고 싶은 말이 없어지지 않을 거라 했지그랬던 내가 이젠 너를 잊어가사랑했다는 말 난 싫은데 아름다운 것을 버려야 하네넌 말이 없었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슬픔이 나를 데려가 데려가나는 너를 보고 서 있어 그 어떤 말도 내 귓가에이젠 머물지 않지만하고 싶은 말이 없어질 때까지만이라도서로가 전부였던 그때로 돌아가 넌 믿지 않겠지만사랑했다는 말 난 싫은데 아름다운 것을 버려야 하네난 나를 지켰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그동안의 진심 어디엔가 버려둔 채사랑했었나요 살아있나요 잊어버릴까 얼마만에넌 말이 없는 나에게서 무엇을 더 바라는가슬픔이 나를 데려가 데려가― 언니네 이발관, 〈아름다운 것〉, 《가장 보통의 존재》, 2008 사실 이 노래에서 슬픔은 사랑과 이별의 두 축을 오가면서 인간이 가진 두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그 하나는 앞서 플라톤이 환영할 만한 측면으로, 사랑으로부터 이별로 향해 가는 나의 현재 모습을 가리킨다. 나를 철저하게 홀로 남은 상태로 현실 세계에 떼어놓는 이별이야말로 인간의 불완전성에 직면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어떤 사정에서든 이별의 순간이 오게 되면 그동안 상대방에게 했던 굳은 약속이나 맹세가 모래성과 같이 여지없이 무너져내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결코 영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에 반해 사랑은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거니와, 기존의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되는 순간들을 만들어내지 않던가.
그러니 이 노래에서 내가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식어가는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것”을 향한 미련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게 “사랑했다는 말”은 과거의 나와 함께 “아름다운 것”을 아득한 추억 속으로 봉인하는 자물쇠와 같다. 이에 대해 밴드의 보컬은 라이브 때 “사랑했다는 말 난 싫은데”를 “사랑했다는 말 뻔한 얘기”로 바꿔 부름으로써 겉으로는 화려한 그 말에 숨겨진 허위성을 폭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슬픔은 우리가 사랑으로부터 이별로 가는 과정에서 다시금 보통의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잘 알다시피 이별은 누가 더 빠르고 더 느린가에 좌우되는 마음의 속도에 따라 측정되기보다는 누가 더 뜨겁고 더 차가운가에 좌우되는 마음의 온도에 따라 측정된다. 나 역시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둘의 관계가 서서히 이별의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며 침묵하고 있다.
이때 그들이 슬픔의 인도에 따라 자기의 길을 가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들이 슬픔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사랑의 관계가 끝나고 완전한 이별의 지점으로 나아간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고, 그 순간 홀로 남겨지고 지극히 평범한 존재가 되어버린 자기 모습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슬픔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사랑의 여정을 향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왜 그러한가. 사실 우리가 지향하던 특정한 대상이 사라지게 되면 그 자리에는 자연스레 공백이 생겨나기 마련이고, 슬픔은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부재한 대상을 향한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가진다면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으나, 그러지 못하는 경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동굴 속으로 삼켜지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노래에서 내가 자신을 온전히 슬픔에 내맡기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슬픔은 그를 또 다른 사랑의 여정으로 데려가게 될 테고, 아마도 그는 기존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특별한 아름다움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만끽하면서 기존의 자기와는 다른 존재로 조금씩 변화해갈 것이다. 물론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은 늘 갖가지 위험과 험난함이 도사리고 있겠으나, 그가 슬픔에 이끌려가는 길을 따라가 보자. 슬픔으로 소요(逍遙)하는 나의 길그렇게 사라져 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네잊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순간도 희미해져 갔어영원히 변하지 않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었지하지만 잊을 수 없는 게 어딘가 남아있을 거야나는 이런 평범한 사람 누군가의 별이 되기엔아직은 부족하지 그래도 난 가네나는 나의 길을 가소나기 피할 수 없어구름 위를 날아 어디든지 가외로워도 멈출 수 없는 그런 나의 길다가올 시간 속의 너는 나를 잊은 채로 살겠지하지만 잊을 수 없는 게 조금은 남아있을 거야새로운 세상으로 가면 나도 달라질 수 있을까맘처럼 쉽진 않겠지만 꼭 한번 떠나보고 싶어나는 이런 평범한 사람 많은 세월 살아왔지만아직은 부족하지 그래서 난 가네나는 나의 길을 가소나기 두렵지 않아구름 위를 날아 어디든지 가외로워도 웃음 지을 수 있는 곳이면어디든 가고 싶네 그게 나의 길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네잊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순간도 희미해져 갔어― 언니네 이발관, 〈산들산들〉, 《가장 보통의 존재》, 2008 어쩌면 그가 낯선 길을 가면서 슬픔으로부터 배운 삶의 진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바로 ‘가장 보통의 존재는 불완전한 존재로부터 완전한 존재를 향해가는 과정에 있다’라는 것을 말이다. 이 노래에서는 특히 가장 보통의 존재가 투철한 의지와 의욕을 가지고 불완전성을 이겨내려 할 뿐만 아니라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을 가지고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자세는 정확히 접속사 “그래도”와 “그래서”의 의미에 호응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먼저, 이 노래에서 그는 철저한 부정의 방식을 통해 내가 되는 길을 실천한다. 그동안 그가 사랑으로부터 이별을 향해 가는 길에서 얻은 깨달음은 자신이 “평범한 사람”, 즉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누군가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결국 식어버리거나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순간들이 희미하게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그가 겪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떠한 체험이든 우리에게 값진 삶의 진실을 하나씩 알려주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지난 시간을 통해 “소나기”와 같이 뜻하지 않은 난관과 시련을 앞으로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진실을 얻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진정 나의 길을 가고자 한다는 것은 다가올 시간에 도사리고 있는 “소나기”와 맞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접속사 “그래도”는 난관과 시련에 대한 극복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니, 그의 삶은 부정을 통한 반동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법하다.
다음으로, 이 노래에서 그는 유연한 긍정의 방식을 통해 누군가를 위한 존재가 되는 길로 나아가고자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가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자기 삶조차 버거워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보다 그가 “많은 세월을 살아”왔고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느 순간 세상일을 대하는 자세가 한결 여유로워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처음에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일이더라도 이것을 몇 차례 겪다 보면 불현듯 세상일에 의연한 순간이 있지 않던가. 그 역시 숱한 난관과 시련을 겪어오는 사이 어떠한 “소나기”를 만나더라도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단순히 나를 위한 삶을 넘어 언젠가 누군가의 힘겨운 삶을 비추는 “별”이 될지 모른다. 이에 대해 접속사 “그래서”는 난관과 시련에 대한 겸허한 수용의 자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의 삶은 긍정을 통한 주체성으로 도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가장 보통의 존재는 “그래도”와 “그래서”라는 이정표에 따라 불완전한 존재로부터 완전한 존재로 가는 중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부정과 긍정, 수동과 능동, 의욕과 초월의 두 자세를 거느리고 “산들산들”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이에 대해 우리는 장자의 말을 빌려 절대적인 자유를 향해 가볍게 발을 내딛는 소요유(逍遙遊)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그 길에서 그는 진정 내가 되면서도 내가 아닌 바깥의 존재가 되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현실에 없는 언니네 이발관의 노래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처럼 말이다.
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