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의미함우리는 이 세계에 존재해 있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아니, 우리는 어느 사이에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며 살고 있으니, 이 세계에 존재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며 살아가는 때가 더 많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다가 아무렇지 않았던 우리 삶의 기반을 손쉽게 뒤흔들만한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침투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 우리와 이 세계를 연결하던 보이지 않는 끈이 툭 끊어짐에 따라 바삐 돌아가던 우리 인식의 회로는 중단되고, 지극히 평온하던 우리 심장에는 불쾌감이나 불안감이 엄습해오기 마련이다. 아마도 우리의 눈앞에는 가뭄으로 인해 바싹 메마른 논바닥과 같이 흉측한 세계의 균열이 드러나고, 그 틈에서 새어 나오는 시커먼 어둠과 마주하게 되면서 누구나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이처럼 존재를 둘러싼 질문이 메스꺼움과 구토를 유발할 만한 일이라는 걸 직감한 사람으로 우리는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를 기억할 만하다. 그의 실존주의 철학의 맹아를 품고 있는 초기 소설 《구토》(1938)에서 자신의 분신이라 할 주인공 로캉탱을 일상생활과는 다른 낯선 공간에 떼어내고 존재의 공황 상태로 밀어 넣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북한 존재의 무리였다. 우리는 너나없이 누구나 거기에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당황하고 어딘지 불안한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서로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공연한 것’, 이것이야말로 저 나무들, 저 철책들, 저 조약돌들 사이에서 내가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 (…중략…) 그 관계들(인간 세계의 붕괴를 지연시키기 위해 내가 고집을 부려 유지하려던 그 척도와 양과 방향의 그 관계들)을 나는 임의적이라고 느꼈었다. 그 관계들은 사물에게는 이미 들어맞지 않는 것이었다.― 장 폴 사르트르, 강명희 옮김, 《구토》, 하서출판사, 2014소설에서 로캉탱은 지극히 사소한 돌에서부터 시작하여 주변에 놓인 갖가지 사물과 존재로부터 시시때때로 돌발적인 구토감을 느낀다. 물론 이 구토감은 그 자체만으로 달가운 일이라 보기는 어려우나, 존재의 차원에서는 양가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바로 이 세계에 놓인 사물과 존재들의 우연성에서 비롯된다. 위에서 로캉탱이 어느 공원에 있는 마로니에에서 그것을 깨달았던 것처럼, 사실 우리는 이 세계에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던가. 이 순간 사물은 우리의 눈앞에 있는 그대로 명징함을 가지고 다가섬에 따라 당혹감이나 불안감을 유발한다. 다른 하나는 바로 우리 자신을 기존의 세계로부터 끄집어내는 계기가 된다. 앞서 우리가 사물과 존재에 씌운 추상이나 관념을 떼어내게 된다면 우리 눈앞에 그것의 적나라함이 드러나는 것과 같이, 애초 인간은 무의미한 존재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 순간 우리가 느끼는 무상감이나 허무감은 소극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해방감과 같은 과감한 결단과 통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신을 비속하게 만드는 생존과 자신을 갱신하게 만드는 실존의 갈림길에 선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인간 존재에 관한 성찰은 철학에서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주제이기도 하면서 문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일례로 벌써 오래전에 출간되었으나 좀처럼 세월의 먼지가 앉지 않은 송찬호 시인의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1989)를 들 수 있다.
실제로 시인이 “어둡고 아름다운 이 세상에 이 시집을 바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시집은 세계에 관한 비극적이고 황홀한 인식의 산물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인가. 이 시집에서 인간 존재는 ‘밥’으로 대변되는 생존경쟁의 현장에서 ‘짐승’과 같이 살아가거나(〈좁디좁은 세월의 길목에서〉) 심지어 세파로 인해 사지가 잘려버린 ‘통나무’로까지 격하되어 있다(〈그런 날〉). 그러면서도 이 시집에서 인간 존재는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불가능한 꿈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추구하려는 존재로 거듭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단순한 양가적인 대립을 넘어선 관점에서 인간 존재의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해볼 만하다.이 세계의 살인자가 된다는 것장지의 사람들이 땅을 열고 그를 봉해 버린다 간단한외과 수술처럼 여기 그가 잠들다가끔씩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그곳에 심겨진 비명을 읽고 간다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단단한 장미의 외곽을 두드려 깨는 은은한 포성의 향기와냉장고 속 냉동된 각 진 고깃덩어리의 식은 욕망과망각을 빨아들이는 사각의 검은 잉크병과책을 지우는 사각의 고무지우개들오래 구르던 둥근 바퀴가 사각의 바퀴로 멈추어 서듯죽음은 삶의 형식을 완성하는 것이다미래를 예언하듯 그의 땅에 꽃을 던진다미래는 죽었다 산 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그러나 산다는 것은 얼마나 찬란한 한계인가그 완성을 위하여세계를 죽일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날마다 살인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은폐허 속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망각 속에서 우리가 살인자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풍성한 과일을 볼 때마다그의 썩은 얼굴을 기억하듯여기 그가 잠들다여전히 겨울비는 내리고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송찬호,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민음사, 1989지극히 당연하게도 우리는 언젠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유한한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그 죽음을 체험해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죽음은 미래의 어딘가에 실현되지 않은 당위성으로 놓여 있을 뿐 “산 자들은 결코 미래에 도달할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는 불완전하게나마 거칠고 차가운 죽음의 외피를 만져보기도 한다. 바로 뜻하지 않은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말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는 생물학적, 육체적 죽음에 이른 타자를 죽음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장례 행위에서 시작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에는 화장(火葬)을 통한 장례 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으니, 이 시에 나오는 매장을 통한 장례 풍습보다는 더 간단한 “외과 수술”처럼 되어버렸을지 모르겠다.그때 우리는 타자가 죽음의 입구에 들어서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간 망각해오던 한 진리, 즉 세계의 유한성을 못내 실감하게 된다. 완벽하게만 보였던 “단단한 장미의 외곽”이 시간이 지나면 “은은한 포성의 향기”를 내뿜으며 붉은 꽃잎을 떨구는 것처럼, 그리고 살면서 갖가지 욕망이 들끓었던 육체가 “냉장고 속 냉동된 각진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만년필로 “사각의 검은 잉크병”에 담긴 잉크를 적셔 기록함에 따라 우리의 기억이 망각으로 변해버리는 것처럼, 그리고 “사각의 고무지우개”를 통해 책으로 상징되는 인류의 지식이 금세 다른 지식으로 대체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계 자체와 거기에 속한 생명들이 근본적으로 유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는 법이다.물론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입구에 들어설 수는 없겠으나, 이미 죽음의 입구에 들어서 있기도 하다. 그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의 형식으로서, 일종의 실존적 죽음과 상징적 죽음의 방식으로 실현된다. 먼저, 실존적 죽음은 내가 나에게 죽음을 선고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행위를 의미한다. 성년의 날을 예로 들어보자. 주지하다시피, 이날은 매년 5월 셋째 주 월요일이 돌아보면 만 19세가 된 청년에게 성인으로서 위상을 부여하는 사회적 의례와 같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가 진정한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를 위해 우리는 나날이 기존의 나를 ‘무’(無)로 돌려보내고 내 삶을 갱신해가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다음으로, 상징적 죽음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향해 죽음을 선고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인식의 행위를 의미한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는 여러 사람의 인식을 거친 일반적인 담론이 유행하고 있거니와 그것들이 우리의 사회적인 존재 의미를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임의적인 가능성으로서 의의가 있을 뿐 그 자체로 절대적인 진리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가 조금만 과거를 성찰해본다면 세계와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은 계속해서 바뀌어왔으며, 다른 이들의 눈부신 작업에서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하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기존의 세계에 안주하기보다 그것을 ‘무’로 돌려보내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행위를 감행할 수밖에 없다.이처럼 우리가 실존적 죽음과 상징적 죽음의 방식으로 죽음의 입구에 들어서 있기에, “산다는 것”은 진정 “찬란한 한계”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그러한 죽음의 방식은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지고 출현하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의 경우 그것은 철저하게 ‘말’(언어)과 그를 둘러싼 인간 존재의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미완성형의 세계를 창조할 권리말은 나무들을 꿈꾸게 한다 말을 시작하면팔은 부드러운 나뭇가지로 변하고딱딱한 몸도 나무 기둥으로 구부러진다(약간 뒤틀리는 것이 자유롭고 편하다!)이윽고 내 몸속에 숨어 있던 밤의 여인들이 나타난다이미 오래전에 죽은 줄만 알았던 그 묘령의 여인들이,허리 아래로는 한 몸으로 붙었으면서여러 개의 가슴으로 나뉘어져 뻗어 올라간이 다성적인 나무의 줄기들흩어졌던 여러 갈래의 말들이 내게로 모여 어느성년을 만난다 유년 시절, 어떤 아이가 얘기하길말, 그것은 이상한 악습 아무짝에도 쓸모없던그 다리 한 짝이, 그 세 번째의 다리가다 자란 지금도 나를 절뚝거리게 하고 있어자기들의 대화는 조금도 손상하지 않은 채가느다란 나뭇가지가 길게 뻗어 와 손을 내민다이미 오래 침묵하였던 입술로동그란 모음을 그 손가락에 끼워 준다가지마다 푸른 물방울 보석만 반짝이는 깊은 밤이렇게, 침묵보다 더 큰 약속이 어디 있으랴발이 왜 이리 가볍지,진흙 덩어리 공기의 덧신을 신었었나?― 송찬호, 〈말은 나무들을 꿈꾸게 한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민음사, 1989아이러니하게도 시인에게 ‘말’(언어)은 인식의 감옥이기도 하고 인식의 해방구이기도 하다. 왜 그러한가. 일차적으로 ‘말’은 의사소통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사회적인 존재로 성립시키는 필수 성분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우리가 말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 말이 환기하는 의미는 점차 고착화하고, 그에 따라 말은 우리의 인식에 일정한 이념적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가. 어느 순간 우리는 말에 드리워진 이데올로기적인 시선으로 오히려 대상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그에 관한 사례로 시인은 ‘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로 달이 우리에게 미지의 대상일 때에는 풍부한 상상력을 유발하였다가 우리가 그것을 과학기술로 정복하거나 영감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는 “상징의 밥”과 “비유의 옷”으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제 달은 그 어떠한 창조적인 인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무미건조하고 획일화된 인식을 생산해내는 “인공 정원”이 되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위의 시에 나오는 ‘나무’ 또한 말이 우리의 인식 구조에 미친 영향에 따라 겉으로만 화려해 보이는 “아름다운 감옥”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에게 나무는 “정치적 낭만주의자들”이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이념의 결과와 같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지상과 동떨어진 허공에 다른 세계를 건설하려 했지만 결국 뿌리 내린 나무와 같이 지상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았는가.그러니 사실 우리가 특정 이념에 사로잡혀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말은 그 자체로 불완전한 기제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우리는 현대언어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의 견해를 참조해보면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말하자면, 그에게 언어기호는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청각영상, 즉 기표(signifiant)와 그것의 개념을 가리키는 기의(signifié)로 나뉠 수 있다. 이때 우리가 통상 음성이나 문자로 지각할 수 있는 기표와 그것을 통해 환기되는 기의의 관계는 사회적인 규약에 따라 일시적으로 정해져 있을 뿐 애초 자의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말은 시인에게 한계를 가진 대상임을 넘어 새로운 존재를 향한 모험을 가능하게 하는 발판이 되는 것은 아닐까.이에 관한 한 방법으로 시인은 말을 수단이나 도구로 사용하는 기존의 관습과는 반대로 오히려 말 자체를 인식의 주체로 삼고자 한다. 그건 인간 중심적인 자세를 가지고 사물이나 존재에 대해 일방적인 폭력을 가하려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인식의 과잉이나 무게감을 최대한 덜어내려는 “침묵”에 가깝다. 이를 위해 시인은 자기의 인식 행위를 멈추고 말이 사물이나 존재를 규정하는 길을 따라간다. 이 순간 시인은 놀랄만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나무의 실체를 덜어내고 순수한 물질성을 가진 ‘나무’라는 말은 그의 팔을 “부드러운 나뭇가지로 변”하게 하고 “딱딱한 몸도 나무 기둥으로 구부러”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다른 존재들도 눈을 뜨고 “다성적인 나무의 줄기들”로 몸 바깥에 뻗어나가게 한다.이처럼 우리가 말이 낸 길을 따라가게 될 때 어느 순간 우리를 묶고 있던 지상에서 벗어나 여태까지와는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법하다. 마치 우리의 발이 “진흙 덩어리 공기의 덧신”을 신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말이 선사한, 이러한 자유로운 존재에 대해 우리는 ‘나무-인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면 어떨까. 그러니 우리에게 요청되는 삶의 자세란 과감한 죽음의 결단과 통한다. 결국 이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세계를 감옥으로 인식하는 한편, 그것을 끊임없이 무너트리려는 전위적인 인식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서 번개와 같이 로캉탱의 뇌리에 스친 다음과 같은 생각처럼 말이다.“그 존재들은 줄곧 갱신되는 것이었으며, 결코 탄생하는 것이 아니었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