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통과의례, 안개지나간 청춘의 시절은 누구에게나 어렴풋하고도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건 청춘의 자리마다 자신의 시야를 에워싸는 짙은 안개를 누구나 마주한 적 있기 때문이리라. 그때 우리는 원하는 모든 걸 쟁취할 것 같은 기세로 청춘의 문턱에 들어섰으나 좀처럼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듯한 불투명한 심정을 시시각각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안개에 휩싸인 그 길을 중도에 포기하거나 이탈할 수는 없다. 관대한 시간의 손길에 이끌린 채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스스로 삶의 요령과 기술을 터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청춘을 지배하던 안개가 무정형성을 띠고 있어서 우리를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했다는 것을, 그리고 유동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를 변화의 흐름에 내맡기게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을지 모른다.이처럼 안개가 청춘의 통과의례로서 요청된다는 사실을 안 사람으로 우리는 유재하(1962~1987)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의 처음이자 유작이 되어버린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1987)에 실린 곡들은 불확실한 청춘의 길목에서 이정표를 찾으려고 고투한 기록과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리워진 길〉은 개인적인 사정과는 별개로, 믿었던 진리가 무너진 자리에서 나를 낯선 타자로서 발견하게 된 경험담을 담고 있다. 멜로디가 흘러나오자마자 이 노래에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자욱한 안개가 깔려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시기상으로 미뤄보건대 그는 아마도 사회 전체를 지배하던 거대 담론이 점차 퇴조해가고 일상성의 세계가 열리는 상황을 엿보았던 것 같다. 그러니 그는 집단성과 동일성에 갇힌 “나”에게 이별을 고하고 새롭게 탄생한 낯선 나, 즉 “그대”에게 “주어진 길”을 찾아 나서려는 게 아닐까.이러한 안개의 통과의례는 그보다 두 해 앞서 태어난 시인 기형도(1960~1989)의 시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다만 유재하의 경우 사회적인 상황이 배후에 밀려나 있고 개인 내면의 정황이 전면에 노출되어 있다면, 기형도의 경우 사회적인 상황과 개인적인 상황이 교묘하게 중첩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데뷔작 〈안개〉(1985)에 등장하는 “거대한 안개의 강”과 “안개의 군단(軍團)”은 1970~80년대 우리나라에서 산업화·도시화로 인한 자본주의의 사회적 확산 현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때문에 이 시에서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인간 간의 유대관계가 단절되어 서로 소외되거나 대량생산을 위해 인간이 공장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마는 현실을 마치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기형도 역시 한국 사회 전반을 뒤바꿔놓은 근대화의 물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그의 가족들이 거주하던 경기도 광명은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주변으로 밀려난 철거민, 수재민 등 하층민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게 되면서 집안 사정이 악화하게 되고 그의 어머니는 생계 일선으로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가 유년 시절부터 얼마나 처절한 가난에 시달렸을지 짐작할 만하다. 심지어 그가 중학생이던 해에 바로 손위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는 충격적인 일을 겪었으니 그가 얼마나 심리적인 고통에 휩싸였을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기형도 시인은 유달리 삶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장소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장소에 관한 탁월한 사유가 빚어낸 결과물이라 할 만하다.
비장소와 박탈된 존재의 고유성이사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채워졌다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잠깐의 실수 때문에풍성한 햇빛을 복사해내는그 유리담장을 박살내곤 했다그러나 얘들아, 상관없다유리는 또 갈아끼우면 되지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유리를 깬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이상한 표정을 짓던 다른 아이들은아이들답게 곧 즐거워했다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유리담장은 매일같이 깨어졌다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어느 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판명되었다, 열렬로 선 아이들은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기형도, 〈전문가〉,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이 시에서는 권력의 교묘한 통치술이 우리 삶의 터전 곳곳에 침투하여 아무렇지 않게 장악하는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시에서 권력자를 상징하는 “그”와 일반 대중을 상징하는 “아이들”의 관계는 “유리담장”을 둘러싼 사건을 통해 수평적인 관계에서 점차 수직적인 관계로 변화해간다. 그 일차적인 계기가 바로 “부주의한 아이들이” “유리담장”을 박살 낸 “실수”였으나, 그는 오히려 아이들을 안심시키며 “골목”을 즐거운 놀이의 공간으로 삼도록 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당면한 현실 상황에 대한 주체적인 판단력을 상실해갈 만큼 평균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아이들은 그가 덫처럼 놓아둔 “유리담장”을 매일 깨는 행위를 반복함에 따라 그의 통치술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느새 아이들의 내면을 장악해버린 권력의 그림자를 보고서 어찌 섬뜩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시에서 권력이 일종의 물리적 실체라기보다 담론이나 이데올로기에서 파생하는 효과라고 할 만하다. 제목에 나타났다시피, 그는 바로 그는 이 같은 권력의 통치술을 능숙하게 발휘하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자기 집 담장을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울 정도로 아이들의 눈을 현혹하고 있거니와 겉으로는 선량함과 관용을 베풀 정도로 아이들의 의심을 누그러뜨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는 아이들 중에서 “유리담장” 대신에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라며 주장한 한 아이를 골목에서 즉시 “추방”할 정도로 집요함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그 아이는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고 주체적인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사유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그에게 위험한 인물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는 권력자로서 선과 악, 부드러움과 강함, 자유와 구속 등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전복시킬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관계 자체는 시적 상황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나라 현실 상황 자체에 해당하기에 더욱더 문제적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말마따나 현대 사회에서 권력은 가시적이고 거대한 실체라기보다 비가시적이고 미시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 침투해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파놉티콘(Panopticon)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권력의 통치에 길들여 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기형도 시인은 국가 주도의 근대화뿐만 아니라 권력의 사회적 장악으로 인해 변질하거나 파괴된 장소를 이른바 ‘비장소(非場所)’라고 보았던 것 같다. 그 장소야말로 장소 본래의 의미가 박탈되어버린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획일성과 동일성에 함몰되어 인간적인 가치를 전혀 발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시가 전개되어갈수록 시행의 배치가 점차 부자연스럽게 변화해가는 현상에 주목할 수 있다. 이는 특히 4연 5행에서 6행, 5연 2행에서 3행, 6연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 있다. 시인은 왜 그러한 어색함을 무릅쓰려 했을까? 통상적으로 시에서 한 행이 하나의 의미론적 단위라고 한다면, 사실 잦은 쉼표를 통해 가독성을 해치고 여러 행에 걸쳐 시행을 전개하는 방식은 다소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우리가 아이들의 무감각함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상황을 비롯한 우리의 현실 상황을 다른 눈으로 보길 바라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시인이 보기에 권력의 그물망에 포획되어있는 현실 자체가 바로 꿈이자 환상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을 한걸음 비켜난 삐딱한 시선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무장소와 존재의 단독성 회복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기형도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이 시에서 우리는 표면에 드러나 있는 것, 말해진 것보다는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 말하지 못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사랑과 이별에 관한 우리의 통상적인 인식이 빚어낸 오해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이별에 관해 말하자면, 사실 이별은 순전히 만나고 헤어지는 실제적인 문제라든지 서로의 관계를 정리하는 현상적인 문제임을 넘어 자아의 상징화 작업이라고 할 만한 복합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우리가 이별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떠나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람과 창조한 기존의 나를 상징적으로 죽이는 행위를 의미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는 1연에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말함에 따라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철저하게 구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그리고 그는, 즉 현재의 나는 노트 속에 과거의 나를 기록하면서 이별을 고한다. 그는 과거의 나를 향해 “잘 있거라”라며 정확하게 세 번 이별을 고하는데, 이 간명한 말속에는 과거의 내 모습이 오롯하게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짧았던 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과 같이 상대방과 불안한 사랑을 나누던 내 모습, 그리고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과 같이 점차 상대방의 마음과 괴리되던 내 모습, 또한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과 같이 상대방의 마음과 완전히 단절되던 내 모습과 일치한다. 그러니 이 시에서 그가 과거의 나를 향해 한 차례씩 이별을 고할 때마다 현재 나의 노트에는 과거의 나를 철저하게 봉인하는 시공간이 완성되어가는 것이 아닌가.하지만 우리는 그가 노트 속에 구축한 “빈집”을 오로지 과거의 나를 위한 시공간이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그가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라며 실패한 사랑으로 인해 극도의 좌절감에 빠져 있으며, 그로 인해 정처 없는 자신의 마음이 “빈집”과 같은 폐쇄적인 공간에 고립되어 있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우리는 그의 축 처진 어깨를 다독이기보다 사랑의 본질을 더듬어보는 것이 그의 심정을 더 잘 헤아리는 자세일지 모르겠다. 다름이 아니라 그는 바로 “가엾은 내 사랑”이 “빈집”에 갇혔다고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잘 알다시피, 사랑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로 합일되는 일이 아니라 단독성과 단독성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일이 아닌가. 그들에게 상대방은 각자 미지의 세계이기에 사랑은 여태껏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을 경험하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이런 점에서 보자면, “빈집”은 치유와 자기 정화를 위한 제의적 장소라고 할 만하다. 바로 그곳은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진정 나다운 모습, 즉 단독성이 탄생하는 잠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은 기존의 나와 결별하고 새로운 관계성을 형성해갈 가능성의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이 장소는 앞서 권력의 교묘한 통치술이 장악한 ‘비장소’와 달리 뚜렷한 실체가 없고 비가시적인 형태로 출현한다는 점에서 ‘무장소(無場所)’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기형도의 시에서 이 무장소는 비장소에 비하자면 상당히 미약한 빛으로 드러나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불안과 공포가 짙은 안개 속에서 무작정 배회했다기보다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장소야말로 얼마나 귀중한 영역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