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입을 대신한다는 것좀처럼 녹록지 않은 세상살이를 헤쳐가다 보면 우리가 어김없이 마주하게 되는 평범한 진실이 있기 마련이다. 그중 하나가 세상 어느 곳이나 사람의 삶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나 혼자만 인간관계에 유난히 서툴고 지나친 감정 소모로 힘든 줄 알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기색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리고 나 혼자만 유독 아무리 기를 쓰고 해봐도 번번이 시험에 떨어지거나 직장 일에 발 벗고 나서봐야 승진 대상에서 누차 누락되는 줄 알았는데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남모를 고민과 아픔을 마주칠 때가 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왠지 모르게 이 누추한 삶 자체가 안심되고 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어쩌면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나와는 다르지만 어딘지 닮아있는 것 같은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한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삶에서 오는 체험은 구체적이면서도 특별하지만 인간 보편의 삶과 통하는 여운과 감동을 주기 때문이리라. 이를 위해 시인들은 크게 두 가지의 방법을 창조적으로 활용하곤 한다.그중 하나가 지극히 사사로운 내 삶의 체험을 진정성 있게 표현함으로써 집단 전체의 상징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흔히 교과서에서 봤던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라는 구절은 어떠한가. 평안북도 정주에서 나고 자란 시인이 자기 삶을 관통하는 진달래꽃을 떠나는 이의 발아래 흩뿌리는 것은 예기치 못한 이별을 맞이하는 이의 심정과 얼마만큼 닮아있는가. 그러니 우리 각자의 삶에서 획득하는 체험은 특수함과 독특함의 지표이기도 하면서 공통성과 연결성의 지점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시인은 이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즉 타자의 삶에서 내 삶과 흡사한, 인간 보편의 삶을 발견하는 방법으로 독자를 유인하기도 한다. 이에 관한 탁월한 사례를 우리는 과거의 여러 작품에서 찾을 수 있겠으나, 바로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산 한 시인의 최근 시집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닷가 부족이 입을 달아주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권선희 시인의 시집에는 포항을 비롯해 대구 경북에 살았던/살아가는 수많은 서민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끓고 있다.   시집을 넘기자마자 이 목소리는 가난의 무게를 감당하기는커녕 한 노인을 육체적 불구에 이르게 만든 운명에 분노하는 “무당”의 것이기도 했다가(〈징〉),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남은 “김종구씨”가 술에 취해 화풀이하는 “개”의 것이기도 하다(〈김종구씨 가족 김종팔입니다〉). 이 목소리는 얼마나 우리에게 삶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서글픔과 애환을 들려주고 있는가. 또한 이 목소리는 원통한 심정에 소주 됫병을 마시고 쓰러진 척하다가 남편의 바람기를 고친 “귀자 엄마”의 것이기도 했다가(〈건들바람〉), 다른 한 마리의 산비둘기를 유인하다가 지쳐 잡은 산비둘기 한 마리를 해치우려는 “박봉순 집사”의 것이기도 하다. 이 목소리에는 얼마나 우리 삶을 일으켜 세우는 해학과 웃음이 넘쳐나고 있는가. 그러니 우리는 이 복합적인 목소리에서 짠한 웃음이 배어 나온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집에서 이 목소리 자체가 시인의 입을 거쳐 우리에게 바로 도달하는 경우가 있겠으나, 흥미롭게도 이것이 먼저 사물을 빌려 시인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우리가 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 때 어쩌면 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 인간 삶의 폐부를 찌르는 따뜻한 칼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살아남은 사물의 입과 이야기들상군 해녀 우리 고모 요양원 가시자 집 팔렸다며느리 혼수 이불 모시고 좀약 갈아 넣던 자개농 한채대형 폐기물 스티커 붙이고 대문 밖에 나와 젖는다비만 오면 두들겨 맞던몸의 멍이다어린 새끼 맡기고 나서던 새벽마다돌던 젖이다단칸방 얻어 원정 물질하던겨울 흑산도다군불 지필 동백나무 생가지 꺾다터진 눈물이다물내 밴 몸으로 번 돈 받아 들고 나서던흑산도, 다시 봄이다이 빚 저 빚 다 갚고 자개농 월부로 들이던 날종일 퍼붓던 비다― 권선희, 〈자개농〉,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 창비, 2024잘 알다시피,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의 입이 사물의 말을 대신하고 있다. 거추장스럽거나 고리타분한 것을 과감히 폐기하고 편리함과 실용성을 추구하려는 차디찬 현실 논리가 우리의 입을 점령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입을 가진 인간은 나와 같은 피부를 가지긴 했으나 마치 얼음과 같이 차갑게 느껴지거니와 나와 같은 심장을 가졌으나 마치 기계와 같이 내 앞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이 인간의 입은 진정성과 같은 인간다운 가치를 잠식하는 검은 구멍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지만 역방향, 즉 사물의 입이 인간의 말을 대신하는 경우는 그와 다르다. 이 순간 사물의 입에서는 한 인간의 가슴에 억눌려있던 말이나 언젠가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이 마치 신음과 같이 새어 나온다. 그 말이야말로 우리에게 소멸로 향해 가는 인간의 운명을 환기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사물이 인간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권선희 시인은 주로 후자의 방법을 쓴다. 인간보다 오래 살아남은 사물의 입이 인간의 말을 대신하고 인간의 삶을 증언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바로 위의 시에서 그 사물은 “상군 해녀 우리 고모”의 분신이라고 할 만한 “자개농”으로 나타나 있다. 실제로 이 사물은 빛바래고 낡아서 폐기되기 직전의 상황에 있는 것과 같이 “상군 해녀 우리 고모” 역시 늙고 병들어 죽음을 내다보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개농의 입으로부터 고모에 관해 어떠한 삶의 내력을 전해 듣고 있는가. 그건 고모가 “비만 오면” 술에 취한 남편이 휘두르던 폭력을 감내해야 했던 고통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어린 새끼”를 맡기고 이른 새벽마다 일터로 나가야 했던 모성애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모가 가정을 일으켜 세우려고 “겨울 흑산도”까지 “원정 물질”을 나서야 했던 강인함이면서도 좀처럼 줄지 않는 생의 무게로 인해 터져 나온 서러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억척스럽게 번 돈으로 아들을 키워 장가까지 보낼 수 있었던 보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자개농”에는 까마득한 밑바닥에 무너졌으면서도 꿋꿋하게 일어서려 했던 한 인간의 삶이 압축되어있는 게 아닌가.하지만 한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자개농”은 결국 우리 모두의 운명을 닮아있다. 아마도 우리는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다가 그 구석에 있는 쓰레기장에 내팽개쳐지게 될 것이고, 시간의 청소부가 수명을 다한 폐기물들을 수거해갈 거니까 말이다. 물론 이 시에서 “자개농”이 폐기 직전에 대문 밖에서 비에 젖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서도 삶과 죽음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 삶에서 쓸모와 필요의 시간이 다하고 소멸과 죽음의 시간에 이르기 전에 끼어드는 저 잉여의 시간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시집에서 그건 회한과 고마움과 아련함과 그리움과 다독임의 감정이 뒤섞인 간절한 시간으로 나타나 있다.겹겹의 시간과 숙성된 슬픔의 유산아버지는 풍배 타고 나가 고기를 잡았다물칸 넘치게 싣고 돌아오면튼실한 놈들 골라 간독에 넣고 소금을 후렸다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차곡차곡 쟁여 넣던 물고기들목숨이니 어디서든 붙어살겠지저승도 살 곳이라 다들 가는 것이라며큰형 잃은 여름 비린 생에도 간을 쳤다끓는 속내와 솟구치는 부아를 간독에 재우고돛을 세워 바람 타며 별을 읽고 돌아왔다하늘이 배를 묶어 더는 나갈 수 없는 겨울세간 부수는 날에도 아버지 차마간독은 건들지 않았다병에 들자 여러날 곡기를 끊고다들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아주 좋은 곳인가보다그곳으로 건너가실 때 간독은 두고 가겼다혼자 남은 어머니는 간이 잘 밴 아버지를 내다 팔았다참 깊고 어두운 속내였다― 권선희, 〈간독〉,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 창비, 2024통상적으로 우리는 저 멀리 아주 길쭉한 줄처럼 뻗어있는 시간이 나를 관통하고 난 후 내 배후의 어딘가로 흘러가 버린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물론 생물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일직선상으로 전개되는 선형적인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만, 심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시간이 누적되어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 중 누군가의 손때가 깃들어있는 사물을 가지고 거기에 얽혀있는 감정이나 기억 따위를 더듬어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시간은 가벼운 깃털과 같이 지나가 버리는 게 아니라 그루터기에 남아있는 나이테와 같이 어떠한 저장고에서 갖가지 주름을 지닌 채 비축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위의 시에 나오는 간독에는 여러 겹의 시간이 응축되어 있어서 거기에 보관된 물고기로부터 갖가지 슬픔의 맛이 우러나고 있다.첫 번째의 시간은 아버지의 손길이 닿기 전까지 사람들을 거쳐 간 과거의 시간을 의미한다. 주석에 있다시피 간독이란 “바닷가 사람들이 물고기를 염장하던 커다란 독”을 가리키지만 여기에는 수많은 사람의 손길과 여러 굴곡진 삶의 흔적이 배어 있다. 시에서는 간독 속을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으로 채워져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상 그것은 우리나라 서민들의 뼈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간독의 유래를 거슬러 가보면, 일제강점기 수탈과 경제침탈의 역사와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은 1883년 조일통상장정과 1889년 조일통어장정을 체결하여 오래전부터 어자원이 풍부했던 우리나라에서 합법적으로 어로 활동을 진행하였다. 당시 일본의 대형어선은 경상, 전라, 강원, 함경 4도의 해역을 장악하였으며, 구룡포도 주요 침탈 지역 중 하나였다. 이때 우리나라 어부들은 일본인들이 남획하고 남은 물고기를 잡아서 간독에 보관했으니, 간독에는 얼마나 쓰디쓴 서러움이 스며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두 번째의 시간은 아득한 과거의 시간 위에 손길을 더한 아버지의 시간을 의미한다. 평생 어부로서 삶을 살았던 아버지에게 간독은 생의 전부이자 유일한 재산이기 전에 숱한 사람들의 숨결과 삶의 지혜를 담고 있는 역사적인 산물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기잡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차마/ 간독은 건들지 않았”을 만큼 그에게 간독은 엄숙하고 신성한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의 인생은 간독을 통해 전해져오는 공통된 슬픔의 맛에다 자기 삶에서 우러나는 독자적인 슬픔의 맛을 더한 것이라고 집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건 어느 여름 목숨 같던 “큰형”을 잃고 나서도 “끊는 속내”와 “솟구치는 부아”와 같은 아픔과 분노를 간독에 재웠던 “비린 생”을 가리킨다. 그러니 아버지의 간독은 얼마나 많은 굴곡진 인생의 흔적으로부터 숙성된 슬픔의 맛을 자아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세 번째의 시간은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남은 가족들의 손길을 더한 시간을 의미한다. 이제 “혼자 남은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일무이한 유산인 간독에 보관된 물고기를 밖에 내다 판다. 물론 거기에는 아버지와 살아오면서 감당해야 했던 삶의 우여곡절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아주 좋은 곳”으로 보내주려는 심정이 녹아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간독에서는 앞서 수많은 사람의 서글픔과 아버지의 서러움에다 어머니의 슬픔까지 더해 있으니 “참 깊어 어두운 속내”와 같은 오묘한 맛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고등어에는 알 듯 모를 듯 그러한 수많은 삶이 빚어내는 복합적인 맛을 머금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가다가 불현듯 평온한 삶을 비집고 들어와 내 삶의 폐부를 아프게 찌르게 되는 오랜 목소리를 듣고 마는 것이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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