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이해를 위한 출발점사실 우리는 타자에 관해 잘 알고 있다며 착각하고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건 상대방이 가진 지극히 작은 부분임에도 마치 전부인 양 단정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존에 통용되어오던 선험적인 잣대를 가지고 상대방의 본질을 판정하는 데 익숙해져 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자세는 얼마만큼 성급하고 또 협소한가.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이 인식의 폭력이 결국 행동의 폭력을 낳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이른바 자기중심주의가 타자를 해부하거나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파괴와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사례를 우리는 두꺼운 역사책에서 보아왔다. 그러니 미지의 대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저기 먼 곳에 있다기보다는 눈에 스쳐 지나가 버린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우리가 어떠한 문학작품을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잘 알다시피, 텍스트에 관한 해석은 근본적으로 개개인의 주관에서 비롯한다. 똑같은 체험을 하더라도 사람마다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니와, 우리가 동일한 단어로 가리키는 감정도 실상 다채로운 결을 지니기 마련이다. 우리가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란 이미 한계를 내포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그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 문학작품으로부터 합리적인 해석을 끌어낼 수 있을지언정 거기서 정답을 도출해낸다는 건 얼마나 무모하고, 또 어리석은 일에 불과한가.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란 끈기를 가지고 타자를 향해 귀를 열어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해석의 가능성을 유보할 때 오히려 타자가 우리를 향해 입을 여는 해석의 가능성이 생기는 순간일 것이다.이러한 자세는 타자에 대한 이해에서도 유효하다. 텍스트에 관한 해석이 텍스트에 관한 해석 불가능성에 전제 조건을 두는 것처럼, 타자에 관한 이해 역시 타자에 관한 이해 불가능성에 전제 조건을 두고 있다. 달리 말해, 우리는 텍스트에서 비롯한 불분명한 느낌을 통해 마음의 길을 내는 것과 같이, 타자에서 비롯하는 온전한 무지를 통해 진정한 소통의 길을 내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이처럼 우리가 타자에 관한 인식을 문제 삼게 된 것은 미궁에 휩싸여 있는 대구 출신의 시인 고월(古月) 이장희(1900~1929)의 삶과 시를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장희 시인은 서른 남짓한 짧은 생애라든지 음독자살로 인한 비극적인 죽음만큼이나 숱한 억측과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현재까지 35여 편 남아있는 그의 시들은 동시대에 활동한 청년 시인들의 치기 어린 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라 치부되었다. 현실에 관한 허무주의적 정서를 농후하게 풍기고 있거니와 도리어 환상적인 세계를 향한 동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장희의 시를 들여다보면 인간의 삶은 어둠과 빛과 같은 양극성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맞붙어 있는 모순된 속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과도한 죽음 충동과 슬픔의 정체시내 위에 돌다리,달 아래 버드나무.봄안개 어리인 시냇가에, 푸른 고양이곱다랗게 단장하고 빗겨있소, 울고 있소,기름진 꼬리를 치들고밝은 애달픈 노래를 부르지요.푸른 고양이는 물오른 버드나무에 스스르 올라가버들가지를 안고 버들가지를 흔들며또 목 놓아 웁니다, 노래를 부릅니다.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칼날이 은같이 번쩍이더니,푸른 고양이도 볼 수 없고,꽃다운 소리도 들을 수 없고,그저 쓸쓸한 모래 위에 선혈이 흘러있소.― 이장희, 〈고양이의 꿈〉, 《생장》 제5호, 생장사, 1925이 시에 나타난 상황은 우리에게 한 편의 소름 끼치는 공포영화를 연상시킨다. 영화의 주인공은 우리 주변에서 잘 볼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푸른 고양이”이다. 마침 인적이 드문 봄밤에 “푸른 고양이”는 한적한 “시냇가”를 울면서 배회하고 있다. 그저 버려지거나 집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 곱게 “단장”하고 있고 또 “기름진 꼬리”를 치든 행색으로 미뤄볼 때 이 고양이는 뭔가 심상치 않은 사연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푸른 고양이”는 한창 생성의 기운으로 충만한 “물오른 버드나무”에 올라가 무언가 갈구하듯 “버들가지” 안고 흔들며 “목 놓아”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닌가. 이때 우리의 눈앞에 느닷없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펼쳐진다. 바로 정체불명의 “검은 그림자”가 다가와서 은같이 번쩍이는 “칼날”을 휘둘렀고, 고양이는 “쓸쓸한 모래 위에 선혈”을 적시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이다.이러한 기괴한 장면에서 우리는 마치 탐정을 호출해야 할 것 같은 낯선 의문에 사로잡힐 법하다. 왜 그러한가. 사실 이장희 시인은 그의 대표작 〈봄은 고양이로다〉(1924)가 오래도록 교과서에 유통되어옴에 따라 우리에게 이른바 고양이의 시인이라고 알려져 왔다. 제목에서 나타났다시피, 이 시에서 고양이의 여러 신체 기관은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다양한 봄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우리의 눈앞에 펼쳐 보이는 매개체가 된다. 그러니 이 시에서 고양이는 어떠한 감정조차 개입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대상화되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위의 시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다르다. 제목에 나타난 “고양이의 꿈”은 실상 고양이에 관한 꿈으로, 시인의 분신이라고 봐야 하니까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고양이는 무엇을 저렇게 갈망하고 있을까?’라든지 ‘어째서 고양이는 저토록 참혹한 죽음에 이르고 말았는가?’라는 의문을 품을지 모른다.잘 알다시피, 인간에게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은 어떠한 상실감에서 연유한다. 이장희 시인에게 그 상실감의 원천 중 하나로는 비정상적인 성장 과정과 가족관계가 흔히 언급되어왔다. 이장희 시인은 당시 대구에서 소문난 명문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가 5살이 되던 해에 별세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이후 2번이나 재혼하여 21남매를 슬하에 두었으니 그가 어떠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을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실제로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중추원 참의를 지낸 아버지와의 마찰로 인해 제대로 된 경제적 지원조차 받지 못했으며 끝내 차가운 골방에서 극약을 먹고 자살하고 만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고양이가 갈망하고 있는 것을 어쩌면 그가 충만하게 채우지 못한 모성으로, 그리고 고양이가 처절한 죽음에 이른 것을 어머니의 부재로부터 오는 슬픔이 결국 자기의 목을 겨눈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새로운 생명력과 생을 향한 의욕커다란 유리잔(琉璃盞)에맑은 물이 넘칠 듯 담아 있고그 속에금붕어가 일렁일렁 노니는데쫑긋한 입술을 방긋이 열면서금붕어는 즐거웁게 물을 먹습니다가녀린 팔을 움직이고기다란 다리를 움직이고금붕어의 하이얀 가슴은 물솜같이 불룩하고요가만히 들여다봄에이 광경은 붉으레한 꿈인 듯하외다아아 커다란 유리잔을 입에 대이고꽃다운 금붕어를 마시고 싶습니다― 이장희, 〈금붕어〉, 《신지식》 제3호, 조선통신중학관, 1925하지만 이 시는 이장희의 생애에 기대 그의 시에 농후한 상실감과 슬픔의 정체를 해석한 우리의 판단이 얼마만큼 단선적일 수 있는가를 말해준다. 공교롭게도 이 시는 앞서 살펴본 〈고양이의 꿈〉과 같은 연도에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적어도 궁색한 삶을 대하는 그의 감정에는 다채로운 빛깔이 수놓아져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 시에서 이장희 시인은 어항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금붕어”를 들여다보면서 고양이의 꿈과는 사뭇 다른 “붉으레한 꿈”, 즉 생을 향한 강렬한 의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눈에 비친 “금붕어”는 어항에 담긴 “맑은 물”을 마음껏 들이마시고 있거니와 그 물을 한가롭게 헤집으며 놀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 삶의 공간과 일체화되고 있다. 그러니 그에게 “금붕어”는 자신이 원하는 바와 괴리된 삶을 일그러진 방식으로 비춰주는 매개가 될 법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소망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장희 시인 또한 현실에서 충족될 수 없는 불가능한 꿈을 포기한 적 없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죽음을 실행에 옮기기 전, 골방에 엎드려 금붕어만을 며칠 동안 그렸다고 한다(〈고월 이장희 평전〉). 이런 점에서 금붕어는 그가 진정 바라고 꿈꾸는 세계가 투영된, 또 다른 분신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금붕어의 정체를 알아차린 사람이 바로 그와 가까웠던 동향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백기만(白基萬, 1902~1969)이었다. 백기만은 위의 시 〈금붕어〉를 자신이 일하던 조선통신중학관의 기관지 《신지식》에 실은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해방 이후 시집 한 권조차 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지우 이상화와 이장희의 합동시집을 펴내면서 이장희의 시집에 ‘금붕어’라는 제목을 달고 그에 어울리는 그림을 표지에 끼워 넣었으니까 말이다.     이 그림에서 맑은 연못을 헤엄치고 있는 금붕어가 앞서 “버들가지”를 안고 흔드는 “푸른 고양이”와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이장희의 삶을 표상하는 두 분신은 이렇게 교묘한 방식으로 만나고 있다. 어쩌면 생이 애틋한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죽음을 잊지 않는 사람일 것이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내다본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생을 향한 간절함을 품은 사람일 것이다. 이장희 시인이 그러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그가 “아아 커다란 유리잔을 입에 대이고/ 꽃다운 금붕어를 마시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건 생과 사를 동등한 자리에 둘 수 있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었던 외침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현실적인 방법을 알지 못했으니 그에게 어항을 수놓았던 “붉으레한 꿈”은 영원히 이룰 수 없는 동경으로만 남았을 뿐이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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