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과 비극적 인간어쩌면 신은 우리에게 세계의 비극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종교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인식의 결과라기보다 지극히 실존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인식의 결과이다. 우리 인간은 사실상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거의 우연한 사건처럼 이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시시각각 이 세계로부터 엄습해오는 불안을 감당하면서 우리의 내면에 움푹 파인 고통의 환부를 들여다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냉혹한 악이나 맹목적인 폭력으로 인해 무너져가는 세계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앞에 굳게 닫힌 미래의 문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신에 관한 믿음에 상관없이 절망과 원망과 항의의 목소리를 높여 ‘과연 신이란 존재하는가’라고 묻곤 한다.이처럼 신의 존재 자체가 질문의 형식으로 출현한다는 것을 안 사람으로 우리는 프랑스의 학자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을 들 수 있겠다. 바로 신에 관한 치열한 명상으로 가득 찬 대표작 《팡세》에서 그는 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을 둘러싸고 일종의 발칙한 내기를 걸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 내기에서 그는 “신이 있다 혹은 없다”라는 두 개의 패를 제시하면서 그것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행복”의 관점에서 계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신이 있다는 패”를 택했을 때는 다음과 같은 득과 실을 얻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그 패를 통해 이기게 된다면 “모든 것을 얻게 되고”, 우리가 그로 인해 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신의 존재를 믿는 것 자체는 아무런 해가 없으니 “신이 있다”는 패에 모든 것을 거는 일이 그의 입장에서는 합당하지 않았겠는가.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이 문제는 신의 존재 방식 자체가 미궁에 휩싸여 있기에 난해한 것이다. 실제로 파스칼은 이에 대해 “신이 어느 정도 숨어 있고 또 동시에 어느 정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정당할 뿐만 아니라 유익하다.”라고 능청스럽게 말하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프랑스의 평론가 루시앙 골드만(Lucien Goldmann, 1913~1970)은 신은 “언제나 현존하며 언제나 부재”한다면서 이른바 파스칼의 “숨은 신”에 주석을 달아준 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여기의 삶에 대해 절실함을 품게 될 때 파스칼이 제시한 질문의 형식은 다음과 같이 확장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전에 신이 있었다면, 신은 앞으로 이 세계에 도래할 것인가’라고. 그리고 ‘그 전에 신이 있었다면, 지금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고. 이러한 질문이야말로 바로 시가 품을 수 있는 질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모티프로 한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약자의 목소리와 신의 부재에 관한 질문산 밑까지 내려온 어두운 숲에몰이꾼의 날카로운 소리는 들려오고,쫓기는 사슴이눈 위에 흘린 따뜻한 핏방울.골짜기와 비탈을 따라 내리며넓은 언덕에밤 이슥히 횃불은 꺼지지 않는다뭇 짐승들의 등 뒤를 쫓아며칠씩 산속에 잠자는 포수와 사냥개,나어린 사슴은 보았다오늘도 몰이꾼이 메고 오는표범과 늑대.어미의 상처를 입에 대고 핥으며어린 사슴이 생각하는 것그는 어두운 골짝에 밤에도 잠들 줄 모르며 솟는 샘과깊은 골을 넘어 눈 속에 하얀 꽃 피는 약초.아슬한 참으로 아슬한 곳에서 쇠북 소리 울린다.죽은 이로 하여금죽은 이를 묻게 하라.길이 돌아가는 사슴의두 뺨에는맑은 이슬이 내리고눈 위엔 아직도 따뜻한 핏방울……― 오장환, 〈성탄제(聖誕祭)〉,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이 시는 우리의 눈앞에 실제를 방불케 하는 한 편의 생생한 영상을 펼쳐 보인다. 이 영상에 등장하는 주요 대상은 비대칭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그 하나의 대상이 “포수와 사냥개”와 함께 하는 “몰이꾼”. 즉 강자이고 또 다른 대상이 “쫓기는 사슴”, 즉 약자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마침 “몰이꾼”에 의해 쫓기던 사슴 중 “어미”가 어찌할 도리가 없이 부상을 입은 채 쓰러져있고, 그 어미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어린 사슴”은 홀로 살아남아서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고 있다. 이때 “몰이꾼”들이 “어두운 숲” 속에 밝히는 “횃불”과 “쫓기는 사슴”이 “눈 위에 흘린 따뜻한 핏방울”은 이들의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빚어진 상황의 긴박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는가.이런 상황에서 시인의 눈이라 할 만한 카메라의 렌즈는 풍경의 바깥에 있다가 서서히 풍경 속 “어린 사슴”의 눈과 동일시된다. 그러면서 절체절명의 순간 “어린 사슴”이 쓰러진 “어미의 상처”를 핥으며 무엇을 생각했는가를 묻는다. 아마도 “어린 사슴”의 눈에 비친 것은 “어두운 골짝에 밤에도 잠들 줄 모르며 솟는 샘”이나 “깊은 골을 넘어 눈 속에 하얀 꽃 피는 약초”와 같이 “어미의 상처”에 새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치료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간절한 바람과는 무관하게 어미 사슴은 그동안 쫓기던 사슴들이 결국 죽음에 이른 것과 똑같은 길에 다다르고 말았다. 이것을 바라본 “어린 사슴”의 눈에 맺힌 눈물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이 지점에서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성탄제”라는 제목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성탄제, 즉 크리스마스는 인류를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온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기 위한 축제일이다. 이날만큼은 이 세상 누구라도 소외되지 않고 평화와 평등을 마음껏 만끽해야 하겠으나, 정작 이 시에서 “어린 사슴”이 놓인 상황은 그것과 정반대되는 파괴와 살육의 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어린 사슴”에게 신의 구원은 까마득한 어둠에 휩싸여 있을 만큼 차단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상황 설정에 대해 이 시가 일제 말 암흑기에 창작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당시 우리 민족이 일본 군국주의의 폭압에 짓눌려있던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구원과 관련하여 적어도 우리에게 요청되는 자세는 거대한 것을 엄정하게 판정하기보다 작은 것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비인간적인 폭력성을 엿본 “어린 사슴”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그 전에 신이 있었다면, 신은 과연 이 세계에 언제 도래할 것인가’라고. 그리고 우리는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볼 수 있겠다. ‘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은 어째서 약자에게서 시작되어야만 하는가’라고. ‘어째서 약자의 목소리는 신에게 가닿기 전에 휘발되고 마는가’라고. 그 반대편에 있는 악의 존재들은 결코 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법이다.
인간의 숭고함과 신의 현존에 관한 질문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가난한 아희에게 온서양 나라에서 온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진눈깨비처럼― 김종삼, 〈북 치는 소년〉, 《십이음계》, 삼애사, 1969이 시에서 신은 두 아이의 비대칭적인 상황에 따라 내용이 텅 빈 형식으로 출현하고 있다. 그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가난한 아이에게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이다. “서양 나라에서 온” 카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북치는 소년”과 같이 이국적이고 화려한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먹고 살 수조차 없는 궁핍한 현실에 내몰린 아이에게 이 카드는 전혀 위안과 공감조차 될 수 없는 허황한 세계가 아니겠는가. 작품이 창작된 시기를 감안할 때 가난한 아이는 전쟁의 포화에 휩쓸린 고아라고 볼 수 있거니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고향을 잃고 평생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던 시인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는 가난한 아이가 황폐한 현실로부터 겪은/겪을 고통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이 지점에서 우리가 잠시 가난한 아이의 처지가 되어본다면, 신은 “아름다움”의 문제로 출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시인은 지극히 짧은 시행을 통해 풍부한 여백을 마련하고자 하는 가운데 “아름다움”이라는 시어를 정확히 두 번 쓰고 있다. 한 번은 가난한 아이가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의 외형에서, 다른 한 번은 그것을 본 아이의 감정 상태에서 말이다. 사실 우리에게 “아름다움”, 즉 미란 어떠한 현실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만한 대상을 가리킨다. 이를 신과 연결해본다면, 가난한 아이에게 신은 존재한다는 그 자체를 의심할 수는 없고 어떠한 내용으로 존재해야 하는가가 불분명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가난한 아이에게 요청되는 자세는 자기 삶 속에서 어떻게 저 텅 빈 내용을 채워가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에 달려있을지 모르겠다.이런 점에서 마지막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이라는 구절은 우리에게 예사롭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물론 이 또한 기존의 해석을 참고하여 앞서 언급한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에 그려진 대상이라는 점에서 가난한 아이에게 열악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세계처럼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가난한 아이를 둘러싼 실제 현실의 모습이라고 보면 어떠할까. 아마 우리에게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는 가난한 아이와 같은 처지에 놓인, 함께 살아가야 할 일원, 즉 지상의 것으로, “진눈깨비”는 그들을 보듬어주는 천상의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이처럼 자기 주변에 내재해있는 신성한 것을 발견하는 눈에서 우리는 인간의 숭고함을 발견할지 모른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숭고함을 통해 가난한 아이가 비속한 현실로부터 오는 고통을 이겨나갔을 거라고 믿을지 모른다. 실제로 김종삼 시인은 말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 바 있다.그런 사람들이엄청난 고생 되어도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그런 사람들이이 세상에서 알파이고고귀한 인류이고영원한 광명이고다름아닌 시인이라고―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에서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