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의 싸움 이야기2018년 12월 11일 새벽 3시 23분,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 있는 석탄 운송용 컨베이어벨트에서 한 청년 노동자가 끼어 숨긴 채 발견되었다. 당시 24살이었던 이 청년 노동자는 바로 김용균으로, 한국서부발전의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 소속의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그가 첫 직장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한 지 3개월 남짓 되던 때였다. 그때 그의 시신은 온통 새까맣게 변해있었을 만큼 참혹했고 머리와 몸이 따로 분리되었을 만큼 만신창이였다.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작업이 계속 진행되어 5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그의 처참한 죽음은 우리나라 노동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는 기폭제가 되었다.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안전과는 거리가 먼 열악한 근무 조건이 드러났거니와 원청·하청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 간에 이루어지는 불합리한 계약구조가 드러났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의 죽음은 노동 환경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목숨을 담보로 하여 어쩔 수 없이 위험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결과라고 할 만하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는 2020년 1월부터 일명 김용균법, 즉 산업 현장의 안전 규제를 대폭 강화하려는 산업안전보건법을 시행하였고, 2022년 1월부터는 중대 산업재해 발생 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려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시행하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해마다 2,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하고, 여전히 10만여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당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이 글은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을 파헤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보다 남은 자들은 소중한 사람을 한순간에 잃고서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해 주목하고 싶다. 실상 그들에게 상실한 사람은 죽음의 형태를 띠고 있을 뿐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다. 그들이 그의 죽음을 인정하는 순간 그를 위험에 몰아넣은 비인간성과 시스템을 승인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그의 죽음과 함께 얼마나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견디며 살고 있을지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섣부른 판단을 중지하고 그들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이와 관련하여 사단법인 김용균재단이 기획한 《김용균, 김용균들》이라는 책은 남은 자들의 목소리에 세심하게 귀를 열어놓고 이를 생생하게 들려주려는 작업의 결과물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김용균의 죽음으로 인해 일상생활 자체가 아예 달라져 버린 가까운 세 사람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받아적고 있다. 그중에서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씨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실감으로 인해 극심한 슬픔에 빠지는 것도 잠시, 아들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제대로 싸우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아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 김용균들, 즉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두 번 다시 보이지 않는 괴물, 즉 “이 사회의 불합리한 관행과 시스템”에 희생되지 않도록 싸우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니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 잠시라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을뿐더러 사회악과 불의를 향한 그녀의 싸움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이 글은 바로 김용균의 죽음을 위한 그녀의 싸움과 이를 모티프로 한 이영광 시인의 시를 겹쳐서 읽어보고자 한다. 시가 길어서 편의상 세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본다.언어의 낙차와 인식의 낙차지지난 겨울에파괴적으로 숨진서부발전 태안화력의비정규직 노동자김용균씨의어머니는어느 인터뷰에서,아들 관련 회의에처음 나갔을 때산별노조가무언지 몰라삼별노조인가보다별 세갠가보다했다고,웃으며울었다별 세개는무엇이었을까……그것을 이제돌아보는데,다른 사람이 됐는데같은 사람이고같은 사람인데도다른 사람 같아보였다그걸 읽으며먹구름, 먹구름 밑에서별 세개라는시를 써보고싶어졌다세게 쓰고싶어졌다이 시에서는 먼저 김용균의 참사를 전후한 인식의 낙차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언어의 낙차에 주목하고 있다. 이 언어의 낙차란 무지의 산물일 수도, 또 오독의 산물일 수도 있겠으나, 그 사람이 오히려 대상과 현실을 둘러싼 진실을 간파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때 그 사람의 눈앞에는 언어의 낙차로 인해 대상과 현실을 가리고 있던 “먹구름”이 사라지고 그것들이 차지하고 있던 본래의 자리가 드러나게 된다. 혹은 그 작용이 역방향으로 이루어지면서 그 본래의 자리가 은폐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을 이 시에서 표나게 내세우는 시어에 천착하여 ‘먹구름 효과’라고 부르면 어떨까. 물론 언어의 낙차가 어떠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든 그 사람은 좀처럼 고통스럽고 불쾌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왜 그러한가.첫 번째로, 이 시에서 언어의 낙차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 김용균의 어머니이다. 바로 그녀는 싸우는 사람이 되어 “아들 관련 회의에/ 처음 나갔을 때”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간파할 수 있었던 경험담을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산별노조”가 무엇인지 모른 채 “삼별노조”로 잘못 알아들었고, 심지어는 이를 “별 세개”로 오인했던 경험이었다. 물론 이 상황은 누구나 처음 겪는 일 앞에서 발생할 수 있을 법하지만, 그녀에게는 웃음과 울음만큼이나 현격한 감정과 인식의 격차를 파생시킨다. 사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이 일어난 사고 현장을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그가 그저 믿을 만한 공공기관에 속해 있었고 안전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는 노동자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작업을 진행해야 했던 실상이 드러났다. 그러니 그녀가 고백하는 무지와 오인은 현실의 실상을 뒤늦게 파악하게 된 그녀의 두 눈을 날카롭게 찌르게 되지 않겠는가.두 번째로, 이 시에서 언어의 낙차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 시인 자신이다. 김용균의 어머니가 “산별노조”를 “삼별노조”로 잘못 알아들은 일을 어디선가 들은 것이 그 계기였다. 이때 그는 그녀가 “삼별노조”를 “별 세개”로 오인한 일에서 엄청난 인식의 낙차를 발견해낸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김용균이 “다른 사람이 됐는데” 여전히 “같은 사람”인 것, 다시 말해 그가 비록 죽었음에도 아직 김용균이라는 사람인 것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어떠한가. 그는 “같은 사람인데도”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는 것, 즉 김용균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가려지게 된 것이다. 바로 그의 어머니가 오인한 “별 세개”라는 차가운 논리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 시에서 “별 세개”는 일차적으로 김용균이라는 고유명을 말살하고 인간적인 삶 자체를 박탈해버린 폭력적인 인식에 불과하지 않겠는가.앎의 영역과 모름의 영역하지만, 못 쓸 것이다내가 별세계에살고 있어서계산을 잘 못해서초등학교 때부터산수를 못해서,내 팔다리는몇개이고목은 몇개며살점은 몇 킬로인지생각해본 적이 없어서별 세개의 아득한빛을 몰라서별빛이 세개면사람이 몇인가사람이 셋이면 별이몇분이신가별빛이 백만개면사람이몇분이신가단 한 사람은몇백만 별빛이신가몰라서,삼원이요오원이요팔원이요일원이요……돈 계산을 못해서죽음 계산을못해서생명 계산을도대체 못해서,세개는 몇개인가세계는 몇원인가알지 못하는별세계에 살아서그 어머니의별 세개가비추는 세계를세다가졸다가취해 잠들려 하는별세계여이러한 점에서 시인은 김용균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별 세개”와는 달리 자신을 “별세계”에 거주하는 시민으로 자처하고 있다. 물론 이 언어적 낙차는 발음의 유사성에 의해 촉발되었으나, 거기에는 앎의 영역과 모름의 영역 간의 현격한 인식의 낙차가 가로놓여 있다. 왜 그러한가. 우리가 어떠한 대상에 관한 앎을 추구하고자 할 때, 사실상 거기에는 대상에 관한 인식적 폭력이 개입해있다. 우리가 그 대상을 주체 중심주의에 따라 일방적으로 판단하거나 그 대상의 파편적인 요소를 마치 전체적인 속성인 것처럼 규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편의적이면서도 맹목적인가. 그러니 이러한 방식은 타자의 본질에 가닿으려고 하는 앎 자체를 봉쇄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우리가 타자에 관한 모름을 인정하게 될 때 진정한 앎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때 타자가 온전히 그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게 되거니와 우리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줄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시에서 “별 세개”는 철저하게 “계산”의 논리에 사로잡힌 자본주의 시스템을 가리킨다. 이 논리에 따른다면, 김용균은 비정규직 노동자였기에 말 그대로 별 세 개, 즉 3등급이라는 낮은 기준과 범주에 포획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김용균의 참사 이후 공개된 한국서부발전의 부서별 평가 문서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세 등급으로 구분하고 있어서 충격을 안겨준 바 있다. 이 문서에서는 산업재해로 인해 사람이 사망하였을 때 발전사 직원의 경우 –1.5점, 하청직원의 경우 –1점, 발전시설 건설 노동자의 경우 0.2점을 감점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애초 이러한 차별과 불평등의 관점에 의한다면, 김용균의 참사는 결국 “죽음 계산”이나 “생명 계산”과 같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처리될 사안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실 김용균의 죽음 이후 회사 측에서는 사건을 최대한 빨리, 효율적으로 매듭지으려 했다고 그의 어머니는 전하고 있다.
이와 달리 “별세계”에 거주하는 자의 시선은 어떠한가. 그는 오히려 대상의 본질을 산술의 논리로 규율하려는 방식에 서툴다고 고백하고 있다. 물론 그가 “산수”를 못한다고 해서 “내 팔다리는/ 몇개이고” “목은 몇개며” 또한 “살점은 몇 킬로인지”와 같은 아주 단순한 산수조차 못한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는 아예 산술의 논리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할 때 “별 세개”는 애초 대상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아득한/ 빛”과 같은 온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별빛이 세개면/ 사람이 몇”인지, 또 “사람이 셋이면 별이/ 몇분”이신지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어도, 한 사람을 “몇백만 별빛”과 같은 모호하면서도 특별한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간은 결국 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와 만나게 된다.타자의 지배 원칙과 타자의 보존 원칙별세계의 자본이며국가여,단 세개를 세고 싶은손가락들과단 세개를 보고 싶은눈망울들과팔다리와 살점과선혈이 없는국가여,먹구름을 치워라별 세개를봐야겠다별 세개를써야겠다추적추적 비 내리는국가여 흉가여,별 세개를 못 보겠다별 세개를못 쓰겠다― 이영광, 〈별 세개〉, 《살 것만 같던 마음》, 창비, 2024그러면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은 지극히 간단명료한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대상의 본질을 가리는 “먹구름”, 즉 “별 세개”의 논리를 과감하게 청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늘 어둠에서 깨어나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별 세개”의 논리는 대상의 본질과 상관없이 실용성과 편의성에 따라 대상의 등급과 가치를 따지려는 산술의 논리이다. 우리에게 절대적인 위상을 가진 국가야말로 이 산술의 논리에 의존하여 “눈망울들과/ 팔다리와 살점과/ 선혈”과 같은 개별적인 특성을 집어삼키려는 단일성의 체계가 아닌가. 국가는, 더군다나 인간의 손을 벗어난 “별세계의 자본”에 사로잡힌 국가는 타자 지배의 원칙에 따라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는 생명과 존중보다 생존과 파괴가 난무하고 있다.그러니 우리는 국가가 만든 “먹구름”을 걷어치우고 “별 세개”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우리가 “먹구름”을 걷어치우게 될 때 우리의 눈앞에는 복수성과 연대의 세계가 펼쳐진다. 복수성의 측면에서 볼 때 “별 세개”는 각각의 별들이 고유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산물이다. 거기에는 차별과 획일성이 없고 동등함과 다양성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연대의 측면에서 볼 때 각각의 별들이 발하는 빛은 별자리라는 전체의 형상 속에서 더 큰 아름다움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한 별자리의 세계야말로 김용균과 김용균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인간다운 삶의 이념이 아니었을까. 고(故) 김용균의 6주기는 바로 우리의 눈앞에 여전히 두터운 “먹구름”이 깔려있다는 것을 안타깝게 말해준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