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생활이 된다는 것아이러니하게도 시는 우리 삶과 필요충분조건을 이루고 있다. 범박하게 말해 시는 어떠한 상실감의 급습으로 인해 찢어진 마음을 봉합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지탱하던 진실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리고 살가운 사람들이 유령처럼 사라져버리는 현실을 목도한 시인은 가슴에 맺힌 말을 겨우 토해냄으로써 간신히 이 상황을 견뎌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우리 삶은 그 누군가의 마음을 할퀴고 간 시를 요청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생활 곳곳에 침투해있는 슬픔을 목도한 사람은 아픔과 고통이 서린 시 한 줄을 읽고서 간신히 삶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시는 삶을 위한 애도 작업이라고 부를 만하다. 시가 이처럼 우리 삶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 요인 중 하나로는 바로 슬픔의 작동 원리를 들 수 있다. 실제로 죽기 전까지 2년여 동안 슬픔이 하나의 생활을 이뤘던 프랑스의 사상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이를 “애도의 변증법”이라고 불렀다. 잘 알다시피,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그는 그녀의 죽음으로 인한 부재와 직면하면서 두 가지 슬픔을 겪게 된다. 그 하나는 자신을 ‘황폐화된 주체’ 또는 ‘말라버린 가슴’으로서 느끼는 슬픔이다. 물론 이 슬픔은 사랑의 관계가 끊어지고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그가 “‘부재의 현전’과 달라붙어서 늘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를 ‘도덕적 존재’ 또는 ‘아주 귀중해진 주체’로서 느끼는 슬픔이다. 이때 슬픔은 과거의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인간 존재에 관한 보다 높은 사유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된다(《애도 일기》). 이처럼 바르트에게 슬픔은 비속한 생활에 빈틈과 같은 외부의 장소를 열어놓거니와 그것을 새로운 욕망의 무대로 탈바꿈시키는 기제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점을 우리의 삶과 연결해보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가 슬픔을 생활의 동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이상, 우리의 삶과 밀착해 있는 시는 슬픔을 아주 섬세한 방식으로 어루만지고 있고 또 슬픔을 상당히 다양한 방식으로 자리매김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우리는 슬픔을 삶의 양식이자 시의 영양분으로 삼은 탁월한 사례로 최근 간행된 이선이 시인의 시집 《물의 극장에서》를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시집을 넘기자마자 시인은 “반쯤 먹다 남겨 둔 곰표 밀가루”를 통해 “보관기간 지나고도 찾아가는 이 없는 분실물”, ‘북극에서 무너져 가는 세계’, “계절이 바뀌도록 방구석 지키고 있는/ 늙은 공시생” 등과 같은 누추한 생활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과 함께 “장마 내내/ 하품 옮기는 빗소리 쟁이며” 무얼 빚고 있는 곰이라든지 “빗속을 향해/ 발바닥만 한 수제비나 뚝뚝 떼어 넣고” 있는 곰과 같은 “생활의 여분”을 들춰보고 있기 때문이다(〈생활의 발견〉).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시집에서 시인이 생활인으로서 마주하는 풍경이나 대상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려는 섬세한 시선뿐만 아니라 자기의 생활 현장을 독특한 창조의 공간으로 변모하려는 강인한 의욕을 느낄 수 법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집에서 슬픔이 시와 생활 사이에 어떠한 방식으로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주목해볼 수 있다.
타자와 함께 쓰는 생성의 역사매혹은 어디에서 오는가어떻게 오는가딜랴는 우즈베키스탄의 모래바람샤니는 스리랑카의 해변미우끼는 일본의 숲그러니배경은 다 너희들의 것소설은 자음과 모음 들의 그랜드 호텔이라고?그럼시는 민박이라 해 둘까?잠시 들어와 쉬었다 가렴체크인하는 출석부사건은 언제나 미궁을 헤매고주인공은 부재중이지만이 세상에는몰라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분명한 것들은 잘 보이지 않아우리는 모르는 것을 나누어 갖는 사이사랑은 서툰 외국어로 쓰는 일기잖니?모래바람과 해변과 숲사이로자음을 껴안는 모음의 온기매혹은거기 어디 즈음기억하렴읽기 방향은 왼쪽에서 오른쪽이야― 이선이, 〈다국적 한국현대문학 수업〉, 《물의 극장에서》, 걷는사람, 2024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양한 얼굴의 타자를 생활의 무대에서 갖가지 사건을 연출하는 주인공으로 승인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과 타자를 연결할 수 있는 매개체로 언어 대신 슬픔을 놓으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언어는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성립시키는 가장 기초적인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애초 언어 자체가 가진 한계점을 직시하고 있다. 이에 관한 사례로 그는 “세상에서 단 두 사람만 사용한다는 희귀 언어”를 배워 “멕시코 남쪽 마을을 찾아간 친구”가 결국 상대방과 심하게 다투고 한 달 만에 돌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자신이 “미얀마에 사는 은둔자에게 마음을” 전하려고 “일년 남짓 미얀마어를 배워서 편지를 쓴 적” 있으나 결국 주소를 몰라서 부치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준다(〈언어와의 작별〉). 이러한 언어의 불완전성과 소통의 불가능성은 결국 자기 보존 원칙에 사로잡힌 주체 중심주의의 산물이 아니겠는가.이 때문에 시인은 언어와 과감하게 작별하고 자신과 타자 사이에 슬픔의 다리를 놓으려고 한다. 슬픔은 바로 주체와 객체의 구분에서 벗어나 나와 타자가 한 인간으로서 참가할 수 있는 공통의 장소이다. 우리가 그 장소를 공유하게 될 때 언어와 같은 가치평가로 타자를 재단하기보다 오히려 타자를 미지의 세계로 보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오히려 타자를 더 세심하게 보고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됨에 따라 타자의 처지를 보다 열린 자세로 이해하게 된다. 이에 따라 그는 이 시에서 “사랑은 서툰 외국어로 쓰는 일기”라고 말함으로써 언어의 불안전성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사랑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는/ 몰라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말함에 따라 타자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그러한 타자를 향한 포용과 사랑의 자세는 결국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동력이 되기에 무엇보다 소중하다. 이 시에서 시인은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딜랴”, “스리랑카” 출신의 “샤니”, “일본” 출신의 “미우끼” 등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국현대문학 수업”을 진행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주체의 측면에서 볼 때 이 한국현대문학은 오롯이 한 나라의 관점에 의해 쓰인 역사적 산물이기에 외국인 학생들에게는 일방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절대적인 대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이것을 그들의 사회·문화적 배경에 의해 이해할 수 있고 다른 해석이 가해질 수 있는 임의적인 대상으로 삼고 있다. 마치 모음이 자음을 포용하여 차별적인 기호로 거듭나는 것처럼, 한국현대문학 역시 그들의 배경을 포용하여 다국적인 축제의 현장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이런 점에서 이선이 시인에게 일종의 역사란 타자와 슬픔을 공유하여 새롭게 써가야 할 생성의 역사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역사는 단순히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특수한 원리임을 넘어서 우주 자연의 질서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얼마나 보편적인 것인가. 이를테면, 몽돌해변이 “입 속 가득/ 바글거리는” 울음을 토해냄으로써 무너지고 일어서는 자연의 운동성을 펼쳐내는 것처럼 말이다(〈몽돌해변〉). 그리고 겨울날 뜨겁게 입을 맞춘 “물오리 두 마리”가 “살얼음 속에서 불을 캐내고” 있고 열렬한 “노을”이 “대지의 아궁이에 불씨를 옮겨” 담음으로써 우주의 순환성을 펼쳐내는 것처럼 말이다((〈겨울 저물녁〉). 그러니 슬픔은 우리를 타자와 세계와 우주와 연결할 수 있는 중핵과 같다.타자의 아픔을 만지는 귀의 손길아마도 이것은 쉽사리 부러지고 끊어지는 국수의 세계에서 왔으리어쩌면 그늘을 먹고 자란다는 버섯들의 홀씨일 수도 있으리식탁 바닥을 걸레로 훔치다살 부러진 우산처럼 헐거워진 상상을 접거니 펴거니 저녁이 오고우산살 다 주저앉고서야 겨우 당도하는 한 생각이 야윈 비명들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지중해 난민선을 심해로 이끈 건 세이렌이 아니라고올봄 하청 노동자를 실족시킨 건 운동화 속 돌멩이가 아니라고살비듬 같은 부스러기 훔쳐내며살점 떼어 가는 소리 듣지 못한다면내 몸에서 유독 귀만이 문 닫을 줄 모르는 24시간 편의점밤낮없이 기도가 자라야 할 그곳이려니국수처럼 순하고버섯처럼 무른무심을 버무려 도대체 무엇에 쓸까이것은 들리지 않는 비명을 모으는 소리 채집가거나내 나쁜 청력을 염려하는 난청 감별사일지도 모를 일내 귀가 아직 열려 있다면순순히 사라지는 것은 없다고 가볍게 말하지 말아야 하리국수와 버섯이세상에서 가장 작은 목소리를 훔쳐 가려 찾아온 것은 아니리니― 이선이, 〈부스러기를 위한 노래〉, 《물의 극장에서》, 걷는사람, 2024이 시에서 시인은 생활의 바깥으로 내몰렸거나 소외된 존재들의 목소리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폭력적인 세계에 가닿는 눈의 감각에서 나아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가닿으려는 귀의 감각에 유난히 집착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사실 그에게 눈으로 발견되는 현실은 온통 우리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얼음’과 같은 비정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축 공사장 외벽”에 매달려있다가 아득한 지상으로 곤두박질하는 “고드름”은 단순한 자연현상이라기보다 죽음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노동자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오직 먹고살겠다는 “결기”를 가진 이들은 어떠한 위험조차 감수해야 하는 노동환경이 “재배”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고드름〉). 그뿐인가. “아이스아메리카노” 유리잔에 담긴 “얼음의 마음”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린 고국을 걱정하는 우크라이나 유학생의 “얼음의 표정”과 맞닿아 있다(〈아이스아메리카노〉).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내가 어두워져야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을 가지고 눈보다도 귀의 감각을 활성화하여 세상의 후미진 곳을 탐사하려고 애쓴다. 물론 그러한 시도는 특별한 신념을 요청하는 거창한 일이라기보다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서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발생한다. 바로 이 시에서 시인은 “식탁 바닥”에 떨어진 “살비듬 같은 부스러기”를 걸레로 훔쳐내는 상황에서 이상한 상상력에 사로잡힌다. 말하자면, 이 부스러기들은 일차적으로 “쉽사리 부러지고 끊어지는 국수의 세계”나 “그늘을 먹고 자란다는 버섯들의 홀씨”에서 떨어져나왔으나, 그에게는 “심해”로 이끌린 “지중해 난민선”이나 “실족”한 “올봄 하청 노동자”와 같이 사회 바깥으로 밀려난 하위 주체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그는 “살비듬 같은 부스러기”로부터 그들이 이 세상에서 “순순히 사라지”지 않으려고 내지른 “살점 떼어 가는 소리”와 “야윈 비명”을 듣게 되는 것이다.이 지점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목소리”, 즉 소외된 자들이 내는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의 위상을 재정립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그의 귀는 세상의 진실을 향해 닫혀있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귀를 가지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세계를 분명하게 판명한다고 믿는 눈과 같이 생활의 필요에 따라 소리를 취사선택해왔던 귀의 편의성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의 “나쁜 청력을 염려”하고 있다. 그리고 그간 자기의 귀를 가볍게 스쳐 지나갔던 “들리지 않는 비명을” 채집하려고 기꺼이 자기의 귀를 “문 닫을 줄 모르는 24시간 편의점”으로 자처하고 있다. 인간의 감각 중 청각이 제일 마지막에 죽는 감각인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이러한 자세는 얼마나 윤리적인 영역에 가닿고 있는가. 실제로 그의 귀는 공원에서 아이들이 낙엽 밟는 소리에서 “심야배송” 나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온 택배기사에게로 향할 만큼 전방위적이다(〈감자의 맛〉). 또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점자 버튼”으로부터 시각 장애인들이 마주했던 어둠으로 향하고 “소리의 심지에 불을 옮겨” 놓았던 박두성을 떠올릴 만큼 혼종적이다(〈박두성 생각〉).슬픔의 다리를 놓는 것그러니 우리는 어쩌면 슬픔의 다리를 건너서 타자의 문 앞에 겨우 당도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우리의 눈앞에는 “사는 동안/ 가슴 들이치던 자줏빛 멍들”(〈물소뿔을 불다〉)과 같이, 그리고 온몸으로 열매가 된 “시퍼런 멍들”(〈전입신고서〉)과 같이 누군가의 삶 속에 들어차 있는 까마득한 심연이 펼쳐질 것이다. 이 시집에서 우리는 슬픔이 우리 생활에 제공하는, 서늘하고도 따뜻한 지침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