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챙김의 시대우리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의 위기에 봉착한 시대에 살고 있다. 잠시 나와 멀리 떨어져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안다. 다른 이의 삶과 비교하면서 내 삶은 누추하고 팍팍하기만 하고, 생활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앞날은 불투명하기만 한 기분을 누구나 느껴봤을 것이다. 또한 직장생활은 내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고, 대인관계는 점점 실망과 무관심의 비중이 커가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봤을 것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자기의 중심을 잃고 주어진 상황에 그저 이끌린 채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이에 대해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엘렌 랭어(Ellen J. Langer)는 마음놓침(mindlessness)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것은 우리가 기존의 규칙이나 습관이나 목표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님에 따라 내 삶과 괴리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가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현실과는 무관하게 익숙한 안정감을 추구함에 따라 내 삶의 자기 주도성을 상실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에 반해 그녀가 4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탐구해온 마음챙김(midefulness)은 내 삶을 오로지 나의 몫으로 만드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알아차리는 과정”으로서 매 순간 “우리가 놓여있는 맥락과 관점”을 예민하게 느끼는 “몰입의 과정”을 의미한다.그러니까 엘렌 랭어가 제시한 마음놓침과 마음챙김이란 무에서 유를 발명해낸 것, 즉 기존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안한 결과라고 하긴 어렵다. 그보다 유에서 유를 창조해낸 것, 다시 말해 마음의 위치 바꿈이라는 원리에 따라 바깥으로 향하던 내 삶의 관점을 내 안의 마음을 향해 다시 전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미세한 차이는 우리 삶의 질을 좌우하는 현격한 차이를 생산해낸다. 우리가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 할 마음을 놓쳤을 때는 그저 외부 환경에 압도되거나 그 하중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그에 비해 우리가 자기 삶에 집중하는 순간 주어진 상황을 유연하게 판단하게 되며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을 고려하여 내 생활을 진취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엘렌 랭어는 마음챙김을 “모든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상위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녀의 주장을 참조하여 ‘마음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와 같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질 법하다. 물론 과학기술마저 해결하지 못한 이 난제에 대해 우리가 명쾌한 정의를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겨우 마음의 작용을 통해 불확실한 마음의 정체에 답하는 식으로 우회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마음이란 가장 나다운 모습이 파생하는 장소라는 점일 것이다. 이것의 실마리를 우리는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아래의 두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마음과 그리움의 능력찔레꽃 향기에고요가 스며청댓잎 그늘에바람이 일어그래서 이 밤이외로운가요까닭도 영문도천만 없는데바람에 불리고물 위에 떠가는마음이 어쩌면잠자나요.서늘한 모습이달빛에 어려또렷한 슬기가별빛에 숨어그래서 이 밤이서러운가요영문도 까닭도천만 없는데별 보면 그립고달 보면 외로운마음이 어쩌면잊히나요.― 조지훈, 〈마음〉, 《조지훈 전집 1》, 나남, 2010우리 삶을 지배하는 마음의 법칙 중 하나는 최소치와 최대치의 작용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자기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대상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거나 자기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대상을 최대화하려고 한다. 바로 이 시에서 조지훈 시인은 그러한 인간의 생존본능이라고 할 만한 마음의 법칙을 서로 대립시키면서 자기 마음의 진정한 소리를 구별하는 데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다.먼저, 이 시에서 최소치의 작용은 일종의 마음 숨김과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 있다. 왜 그러한가. 1연에서부터 시인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 밤이 자기에게 외로운 까닭이 “찔레꽃 향기에/ 고요가 스”미고 “청댓잎 그늘에/ 바람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사소한 자연현상 때문이라고 말이다. 심지어 그는 이러한 자신의 심적 상태가 “까닭도 영문도/ 천만 없는데”라고까지 말하면서 자신의 본심을 감추는 능청스러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이어지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그는 자기 마음이 “바람에 불리고/ 물 위에 떠가는” 것과 같이 흔들려서 전혀 잠을 이룰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다. 그러니 그가 외로움을 자연 탓으로 돌리려는 건 실상 마음의 상처를 염려하는 최소화의 작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만하다.다음으로, 이 시에서 최대치의 작용은 일종의 마음 드러남과 같은 현상으로 표출되어 있다. 앞서 시인은 이곳에 없는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다칠까 봐 염려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그건 결국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마음 자체의 고유한 문제에 속한다. 시인 또한 그 자연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시의 중반에 부재한 사람의 “서늘한 모습”이 “달빛에 어려”있고, 또 그 사람의 “또렷한 슬기”가 “별빛에 숨어” 있다며 자신의 마음이 그 사람을 향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앞서 “까닭도 영문도/ 천만 없는데”라고 능청스럽게 던진 표현을 “영문도 까닭도/ 천만 없는데”라고 비틀어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간곡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이런 점에서 그는 마음에서 비롯하는 절대적인 능력을 결코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바로 그 능력은 그리움의 능력이다. 그러니 그는 “별 보면” 거기서 자연스레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라 그리운 것이고, “달 보면” 거기서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라 외로운 것이다. 한 사람을 향한 그리움의 마음이란 그렇게 절실한 것이어서 결코 잊힐 수 없는 법이다. 이에 따라 그는 결국 “마음이 어쩌면/ 잊히나요.”라고 자신에게 반문함으로써 그리움의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하고 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에게 공통적인 능력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을 최대화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마음에 좀 더 귀를 열어놓는 사람일 것이다.빛나는 마음과 사랑의 능력툭 웃음이 터지면 그건 너쿵 내려앉으면은 그건 너축 머금고 있다면 그건 너둥 울림이 생긴다면 그건 너그대를 보며 나는 더운 숨을 쉬어요아픈 기분이 드는 건 그 때문이겠죠나를 알아주지 않으셔도 돼요찾아오지 않으셔도다만 꺼지지 않는 작은 불빛이여기 반짝 살아있어요 영영 살아있어요눈을 떼지 못해 하루 종일 눈이 시려요슬픈 기분이 드는 건 그 때문이겠죠제게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달래주지 않으셔도다만 꺼지지 않는 작은 불빛이여기 반짝 살아있어요세상 모든 게 죽고 새로 태어나다시 늙어갈 때에도감히 이 마음만은 주름도 없이여기 반짝 살아있어요 영영 살아있어요영영 살아있어요 ― 아이유, 〈마음〉, 《마음》, 2015이 노래는 아이유 노래 중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노랫말과 멜로디의 아름다움을 통해 마음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 노래는 아이유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제목의 우연한 유사성을 넘어 앞서 조지훈의 시에 대한 화답이라고 할 만하다. 노래의 첫머리에서부터 갖가지 의성어의 묘미를 살려 “너”와 공명하는 내 마음의 상태를 최대치로 그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너는 내 마음에 웃음이 “툭” 터지게 하고, 어떤 때에는 내 마음이 “쿵” 내려앉게 하고, 또 어떤 때에는 내 마음이 슬픔을 “축” 머금고 있게 하고, 또 어떤 때에는 내 마음에 “둥”하고 그리운 “울림”을 생기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기쁨, 좌절, 슬픔, 그리움과 같은 마음 상태는 구별하기나 차등 짓기의 결과라기보다 내 마음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려는 의도에 가깝다.실제로 그녀는 너를 향한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있다. 그녀는 너를 향해 다른 사람 이상의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기에 “그대를 보며” “더운 숨을” 쉬고 있고, 또 그 사람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해 하루 종일 눈이” 시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너의 마음은 자기 마음과 같지 않기에 “아픈 기분이” 들고, 또 “슬픈 기분이” 들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일차적으로 조지훈 시인과 같이 너로 인해 다칠 내 마음을 최소화할 법하겠으나, 오히려 마음의 최대화라는 정면 돌파의 길을 택한다. 그녀는 상대방에게서 자기 상황에 관한 인정을 바라지도, 또 거의 짝사랑에 가까운 자기 마음에 관한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건 오롯이 상대방 마음의 영역이니까 말이다.그보다 그녀는 자연스러운 자기 마음에 충실함에 따라 너를 향한 마음을 최대화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 하나의 방식은 내 마음에 “꺼지지 않는 작은 불빛”, 즉 등불을 내거는 일. 그것은 너를 향한 나의 열망이 지금-여기에 있는 나를 반짝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또 다른 하나의 방식은 “세상 모든 게 죽고 새로 태어나”는 아득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너를 향한 이 마음만은 한결같이 지켜가는 일. 그것은 너를 향한 내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지고지순한 가치를 더해간다는 걸 보여준다. 그러니 그녀가 마음으로부터 획득한 능력이란 사랑의 능력이라 할 만하다. 어쩌면 이는 우리에게 공통적인 능력일지도 모르지만, 너를 진정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를 지켜야 한다는 진실을 우리는 자주 망각하곤 한다.마음에 존재의 집을 짓는 일결국 앞선 두 작품은 우리가 이 세계에 나답게 거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 마음에 충실해야 한다는 단순명료한 진리를 드러낸다. 그만큼 오늘날 우리에게 엘렌 랭어가 제시한 마음챙김이 삶의 절대적인 과제라는 걸 알 수 있겠으나, 이때 그녀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내 마음의 주인은 결코 내가 될 수 없다는 것, 그 전에 내 마음이 나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는 것을 앞선 두 작품이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명제를 “마음은 존재의 집”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겠다. 언어가 바로 인간존재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본질적인 장소인 것처럼, 마음 역시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형성하는 근본적인 장소니까 말이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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