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우리는 사실 홀로 있음을 견디지 못한다. 아니, 세상이 좀처럼 우리가 홀로 있을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이곳저곳에서 나를 찾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 바쁘고, 가깝든 멀든 여러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매스컴에서는 나날이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사건들이 흘러나오며, 인터넷 공간에서는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기발하고 흥미진진한 오락거리들을 접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상당히 다양한 방식으로, 또 빈번하게 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연결의 풍요로움을 누릴수록 극심한 공허감에 사로잡히거나 도저한 자기 상실감에 빠져들곤 한다.이에 대해 근대사회를 “유동하는 세계”라고 정의한 바 있는 폴란드 출신의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에게 띄운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조은평·강지은 옮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2014그는 바로 불확실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진정한 고독과 대면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극도의 외로움에 빠지게 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그의 말마따나 고독에 대해 일정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고독은 우리에게 “매우 불편하고 위협적이며 무서운 조건”으로 인식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이러할 때 고독은 당연히 우리가 피해야 할 삶의 방해물이자 우리를 한 곳에 정체시키는 늪과 같은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지만 고독은 단순한 기분 상태를 가리키기보다는 우리 삶의 근본적인 조건이라 해야 옳다. 우리는 고독을 통해 삶의 자취를 성찰할 수 있고, 타자와의 관계성을 재구축할 수 있으며, 자기 삶의 방향성을 창조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결국 고독이 제 자리를 잃어버렸기에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자기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독의 본래 자리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사계절 중에서 바로 가을이야말로 우리가 고독을 제 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가을은 결실과 소멸, 기쁨과 슬픔, 높이와 깊이 등 양극단의 현상과 가치를 품고 있는 경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 서서 양극단의 모순을 넘어서는 진실을 발견하게 되거니와 고독을 유동적인 흐름과 개방적인 세계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가을에 관한 시를 음미하면서 잃어버린 고독을 회복하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가을의 양면성과 유한한 존재의 인식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길 사이로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김재혁 옮김, 《릴케 전집 2》, 민음사, 2008오래전부터 한국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이 시에서 릴케는 가을이 지닌 두 개의 시간 사이에 고독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그 하나의 시간은 치열한 여름과 맞닿아 있으며 결실의 풍요로움을 완성하는 시간이다. 잘 알다시피, 가을은 그동안 우리의 피와 땀을 쏟아부은 노동의 결과물들이 한창 무르익는 때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인간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신의 뜻으로 좌우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할 수 있겠으나 자연의 위력 앞에선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릴케는 자연의 배후에 숨어서 만물의 성장에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신의 능력을 찬양하는 한편, 그러한 능력이 우리 양식의 완성에 끝까지 머무르도록 기도하고 있다.이처럼 우리가 가을에 누리는 물질적 풍요로움이란 사실 신이 우리에게 준 축복이자 기적이라고 봐야 한다. 이 사실을 우리가 염두에 둘 때, 3연에 나오는 “지금 집이 없는 사람”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왜 그러한가. 그건 가을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봄이라는 동일한 출발점에 서서 작은 씨앗을 뿌리고 풍족한 미래를 꿈꾸며 나날이 정성과 헌신을 기울인다고 해도 그 결과물은 결코 같을 수 없다. 누군가는 기대 이상의 수확을 얻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전혀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가 성공과 실패라는 사회적 잣대를 가지고 다른 이의 노동을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이런 점에서 우리는 가을을 통해 물질적 풍요로움과 더불어 영혼의 충만함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에서는 가을에 관한 또 다른 시간으로 향하고 있다. 그 시간은 바로 혹독한 겨울과 맞닿아 있으며 소멸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간이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 시간을 맞이함에 따라 이제 집을 짓는 일과 같은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는 오히려 홀로 있음을 통해 사유하고 성찰하고 방황하면서 진정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일에 충실하게 된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시간으로 향하게 되고, 인간 존재라면 누구나 직면하게 될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결국 세계의 심연을 향해 가는 유한한 존재라고 말이다.어쩌면 이 순간 우리는 살아 있음 자체를 신의 기적처럼 느끼면서 앞으로 각자에게 남아 있는 날들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마치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이 삶의 내리막길에서 대표작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1897)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물었던 것처럼 말이다.깊이의 시간과 새로운 시간의 잉태넓이와 높이보다내게 깊이를 주소서,나의 눈물에 해당하는……산비탈과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가까운 길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나의 공허를 위하여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들마저 그 자리를떠나게 하소서,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지금은 기적(汽笛)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바람에 날리소서.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술을 빚어깊은 지하실에 묻는 시간이 오면,나는 저녁종소리와 같이 호을로 물러가나는 내가 사랑하는 마른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김현승, 〈가을의 시〉, 《김현승 시전집》, 민음사, 2009앞서 살펴본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 릴케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와 함께 우리나라 현대 시인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친 거장이다. 한 탁월한 비평가의 말을 빌리자면, 보들레르 등 서구 상징주의자들이 끊임없이 변신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바다로 한국의 시인들을 이끌어 들였다면, 릴케 등 낭만주의자들은 “스스로 자기를 내보이며 자기의 신비를 발가벗기고” 있는 꽃을 한국의 시인들에게 선사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중에서 가을을 유독 사랑하여 가을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썼던 김현승 시인은 가을을 “릴케의 시와 자신에/ 입 맞추는 시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릴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한 바 있다(〈가을이 오는 시간〉). 바로 그에게 가을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대면할 수 있는 “위대한 공허”, 즉 고독의 시간이었던 것이다.앞서 릴케의 시에서 고독이 결실과 소멸, 물질의 풍성함과 영혼의 충만함을 아우르는 균형 감각을 보여주었다면, 이 시에서 고독은 사실 전자보다는 후자로 크게 기울어져 있다. 이러한 의도는 1연에서 그가 신적 존재를 향해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달라고 간청하는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때 그가 말하는 “넓이와 높이”란 인간의 노동에서 비롯된 생산물로서 성장과 기쁨의 시간이 축적된 결과물일 것이다. 그에 비해 “깊이”는 어떠한가. 이것은 유한한 인간이 소멸의 시간으로부터 획득한 인식적 통찰과 내면적 성숙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익숙하게 그 자리에 있어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숨기고 있던 바닥을 드러내고 아득한 무(無)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바닥과 무가 인간 본래의 모습과 가깝다는 걸 우리가 느꼈다면 그 순간 누구나 “가까운 길에서” “배회”하거나 뜨거운 “눈물”을 떨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눈물에는 사람마다 다른 후회, 안타까움, 미안함, 그리움 등 갖은 사연이 담겨 있기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고독은 또한 우리에게 소멸의 시간 속에 새로운 시간을 잉태하고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수확의 결과물을 가지고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술의 진한 향과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저녁 종소리”와 같이 고독한 곳으로 물러가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시는 것은 다가올 새로운 시간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쁨과 슬픔, 소멸과 탄생 따위가 서로 배타적인 가치라기보다 고독이 관할하는 영역 속에서 서로 가깝게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 세상 풍경을 점령해버린 이때, 진정한 나와 마주할 수 있는 고독을 만끽해보면 어떨까.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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