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뿌린 사람, 백신애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목우(牧牛) 백기만(1902~1967)은 생전 《씨뿌린 사람들》(1959)이라는 귀중한 책을 펴낸 적 있다. “경북 작고 예술가 평전”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대구 경북 출신의 예술가 중 10명을 선정하여 이들의 인생과 예술세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한 기획물이었다. 이에 대해 서문을 쓴 이상백은 이 예술가들이 지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거국 거족적인 큰 자취를 남긴 이들”이고 “우리나라 문화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할 이분들”이라고 칭송하고 있다.실제로 이 책에서는 누구나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대구 경북 출신의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대구 출신의 이상화, 이장희, 현진건, 김용조, 이인성, 박태원, 안동 출신의 이육사, 영양 출신의 오일도, 영천 출신의 백신애, 구미 출신의 김유영이 바로 그들이다. 이 중에서 이상화, 이장희, 이육사, 오일도는 시인, 현진건, 백신애는 소설가, 김용조, 이인성은 화가, 박태원은 음악가, 김유영은 영화감독이니, 이 책은 결국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한 대구 경북 출신의 예술가를 망라하려 한 셈이다. 이때 이 글은 다른 누구보다도 경북 영천 출신의 소설가 백신애(1908~1939)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중에서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예술가에 가깝기 때문이다. 실제로 30년 남짓한 백신애의 불행한 인생은 많은 부분이 은밀한 베일에 휩싸여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삶은 그녀가 신흥재력가의 딸로 태어났으나 어릴 적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 우여곡절 끝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으나 머잖아 그만두고 여성운동, 청년운동에 투신하였다는 것, 하룻밤 사이에 쓴 소설 〈나의 어머니〉가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는 것, 아버지의 강요를 이기지 못해 결혼하였으나 남편의 폭행을 견디지 못해 이혼하였다는 것, 틈만 나면 일본, 중국, 러시아 등지를 떠돌아다니다가 끝내 췌장암에 걸려 고통스럽게 사망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물론 이마저도 그녀가 죽음을 앞두고 남들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유언을 남긴 것에 부응하듯, 그간 공백과 미궁을 넘어 억측과 오해의 이야깃거리로서 재탄생되어왔다. 《씨뿌린 사람들》에 실린 〈백신애 여사의 전기〉는 최초로 백신애의 생애를 체계적으로 기록한 가치가 있으나, 바로 백신애에 관한 출처 없는 소문을 파생한 자료 중 하나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동향의 이중기 시인이 오랫동안 열성을 다해 백신애의 생애와 작품을 추적해온 결과, 백신애의 삶의 전모가 좀 더 사실과 진실에 가깝게 드러날 수 있게 되었고, 생전 작품집 한 권조차 없었던 그녀의 꿈이 짜임새 있는 전집으로 실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글은 특히 생전 그녀가 남긴 글 중에서 시로는 유일한 아래의 작품에 눈길이 머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백기만이 《씨뿌린 사람들》의 서두에 남긴 “시인은 씨뿌리는 사람이다. 그 씨는 봄을 부르고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것이다.―모든 예술가는 마침내 시인으로 귀착한다.”라는 글귀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무엇보다 그녀의 시가 “씨”, 즉 자기만의 세계를 건립하는 데 관여한 주된 요소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리라.백술동과 백신애 사이를 왕래하는 삶정차장(停車場)의 신호등은핏빛같이 붉구나내 나갈 길에는흰 눈이 덮혔고바라보이는 허공은새까만 암야(暗夜)인데.오―직 신호등만은핏빛같이 붉구나흰 눈이 덥혔으면더욱 찬란케새카만 암야면더욱 선명케.내, 앞에 영원할 신호등핏빛같이 붉구나이, 한 길을 달려가리라레일을 쫓는 기차와 같이저―붉은 신호등내 심장이로다.― 백신애, 〈붉은 신호등〉, 《신여성》, 1934.6이 시에서 우리는 백신애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핏빛같이” “붉은 신호등”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총 6연으로 이루어진 시에서 마지막 연이 그녀의 삶이 표방하는 지향점이라고 한다면, 이 시어가 마치 씨앗과 같이 처음(1연), 중간(3연), 끝(5연)에 묻혀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에서 “붉은 신호등”은 말 그대로 교통 신호를 표시하는 장치가 아니라 “내 심장”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회적 규약으로 정해진 신호 체계에 따른다면 신호등이 붉은색일 때 교통수단이 앞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그러니 이 시에서 “붉은 신호등”은 주체할 수 없이 약동하는 심장과 결부되어 도전, 열정, 비약과 같은 충만한 의미를 생산해낸다. 그만큼 백신애는 자기 앞에 놓인 삶을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간절하고 또 의욕적이다. 하지만 바로 이 시에서 “붉은 신호등”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두 가지 의미 요소야말로 우리가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그건 “붉은 신호등”이 대립적인 세계를 가로지르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에서 화자가 처한 현실 상황은 대지에 쌓인 “흰 눈”과 허공을 뒤덮은 “새까만 암야”와 같은 양극적인 세계로 나타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화자는 “붉은 신호등”을 통해 “흰 눈”을 찬란하게 밝히고 “새카만 암야”를 선명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백신애의 삶을 단순히 현실의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치기 어린 이상주의자로 환원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보다 그녀의 삶은 현실과 이상의 양극단을 왕래하는 가운데 무정형의 정체성을 획득하려 한 결과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바로 그녀의 이름 자체가 삶의 이편과 저편에 마주 선 양극단의 축을 오간 추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이중기 시인에 따르면, 백신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여곡절 끝에 백술동에서 백신애가 되었다. 그녀는 영천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할 때에는 무잠으로 학적부에 기록되었다가 이후 신애로, 술동으로 학적부에 기록되었다. 그러다가 경북도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2년 남짓한 교사 생활 끝에 술동을 버리고 신애라는 이름을 선택하였다. 자기의 삶을 짓누르는 아버지의 세계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려는 결단이었다.이 순간 백신애는 술동과 신애 사이에서 얼마나 광막한 거리감을 내다보았을까. 하지만 그 거리감은 희열, 두려움, 분노, 슬픔 따위의 복잡한 감정을 자아내며 그녀가 나아갈 길을 가리켰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삶 자체를 수긍하는 것만이 “흰 눈”과 “새까만 암야”로 점철된 현실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마지막 연에서 “레일을 쫓는 기차와 같이” “이, 한 길을 달려가리라”라고 다짐하는 게 아닌가. 이 다짐은 바로 자기 앞에 놓인 삶 자체를 오롯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자기 명령이라 할 수 있다. 그 명령을 따르게 될 때 그녀는 붉은 심장을 가진 한 인간으로 재탄생하게 될 것이다. 다양한 정체성의 가능성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그러면 그녀가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앞에 놓인 삶이란 어떠한 것이었는가. 우리가 이 시를 읽고 나서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점이다. 그것은 그녀의 실제 삶이 증명하듯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월경(越境)이라는 형식과 지리적인 측면에서 모험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먼저,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그녀는 다양한 정체성을 시험하는 인간으로 거듭나고자 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백신애는 1924년 경북도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 뒤 1939년 외로운 죽음에 이르기까지 여성운동가, 소설가, 영화배우 등 다채로운 얼굴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이러한 직업들은 그녀의 내면과 정신을 하나의 영역으로 고정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면서도, 그녀가 자기 삶의 무대를 철저하게 당면한 현실에 두고자 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여성운동가로서 그녀는 여성의 사회적 위상에 대해 상당히 혁신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녀는 여성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순전히 기존의 남성들이 차지한 위치를 탈환하려는 헤게모니 싸움에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이 각자 가지지 못한 특질을 가지고 서로를 보충하는 존재라고 보았고(〈사명에 각성한 후〉), 여성이 단체를 조직하여 사회 제반 문제에 대해 남성을 지도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기도 했다(〈여성단체의 필요〉). 이에 대해 그녀가 여전히 남성 권력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통적인 사고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여성성 자체에서 전위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관해 질문하고자 했던 현실 감각 덕택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다음으로, 지리적인 측면에서 백신애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부단히 여행하고 모험하는 인간으로 거듭나고자 했다. 이중기 시인이 추적한 바에 따르면, 그녀는 영천과 대구에 삶의 근거지를 두고 틈만 나면 서울을 들락날락하는 것도 모자라서 일본, 중국 동아시아 등지를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녔다. 심지어 그녀는 당시 ‘우라지오(浦塩)’라고 불리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밀항한 사실이 발각되어 국경으로 추방되면서도 기어이 가짜 여권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가고 시베리아 일대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만큼 과감했고 또 대책 없었다. 왜 그녀는 이렇게 한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험난한 경계를 넘나들어야 했던가.나는 어릴 때 북극의 오로라의 빛을 동경하여 외롭고 끝없는 방랑자가 되어보고 싶어 했었다. 낯선 이국의 거리를 외로이 걸어가며 언어조차 한 마디 붙여볼 수 없이 가다가 피로하면 희미한 가등 아래서 잘 곳을 찾아 방황하고, 발끝 향하는 대로 어디든지 흐르고 또 흘러가리라고 늘 꿈꾸었던 것이다.방랑자! 방랑자! 이 얼마나 나에게 매력적 어구(語句)이었던가. 따뜻한 어머니 곁에 누워 방랑자의 가지가지 애상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며 가만히 눈물짓기도 한 두 번이 아니었었다.― 백신애, 〈청도 기행〉, 《여성》, 1939.5.죽음을 앞둔 그녀가 고백하고 있듯이, 그건 아마도 방랑자를 향한 그녀의 절대적인 동경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낯선 이국의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는 “외롭고 끝없는 방랑자”를 꿈꾸었다. 방랑자는 말 그대로 어떠한 장소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고 뚜렷한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어쩌면 그의 유일한 목적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이고 그것은 살아있는 한 결코 성취할 수 없는 일이기에 방랑은 끊임없이 방랑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백신애는 위장약을 트렁크에 가득 넣고 다녀야 할 만큼 쇠약해진 몸으로도 방랑길에 올랐는지 모른다.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부단히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끝내 자기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일례로 그녀는 무역 사업을 위해 떠난 오빠를 찾겠다는 명분으로 중국 칭다오로 넘어갔고, 서양인, 중국인, 백계 러시아인이 뒤섞인 화려한 거리를 한복을 입고 쏘다녔다. 이때 그녀는 “내 옷이 세계에 자랑하는 우리 조선옷이었던 까닭에 중복(中服), 양복에 손색없음을 자랑하려는 심리”를 가졌다며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고백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민족성에 대한 자각은 백계 러시아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형상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그러니 우리는 씨뿌린 사람으로서 백신애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삶은 고통스러운 불모지에 다양성과 고유성의 빛깔을 지닌 꽃을 피우려는 하나의 씨앗이었다’라고.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