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받아들이는 것내용적인 측면에서 보건대 예술은 유독 사랑과 이별에 집착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대중가요를 한 번 들여다보기만 해도 안다. 이른바 사랑 노래와 이별 노래가 대중가요의 거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에 대해 우리가 사랑 노래와 이별 노래는 너무 흔할 정도로 널려있어서 뻔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대상에 관한 인식적 폭력에 해당한다. 세상에는 그 사랑 노래와 이별 노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사랑 이야기와 이별 이야기가 있음을, 결국 그 배후에 있는 개별성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왜 그렇게 사랑 노래와 이별 노래가 흔한가?’라는 질문을 ‘왜 예술은 사랑과 이별에 집착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야 한다.그에 대한 가능한 대답 중 하나로, 우리는 사랑과 이별을 구성하는 정동으로서 슬픔이 우리의 삶과 친연성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달리 보자면, 사랑과 이별이 그만큼 상투적인 주제임에도 특별해질 수 있는 건 우리가 슬픔을 통해 우리 삶을 낯설게 느끼기 때문이지 않을까. 사실 슬픔은 우리의 안정된 일상을 뒤흔드는 방식으로 침투하여 일상 어딘가 빈 구멍을 뚫어놓고 부재와 공백을 남겨놓는다. 물론 그 구멍을 가득 채운 어둠과 마주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썩 유쾌하진 않지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인간 실존을 가리키는 진실 하나와 마주하게 된다. 인간은 결국 몰락하는 존재이고,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그럼에도 일상의 우리에게 슬픔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슬픔을 불청객과 같이 별반 반기지 않을뿐더러 어서 빨리 해소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이를 좀 더 수월하게 수행하기 위한 인식론적 처방전으로 기쁨이라는 감정을 맞세운 채 말이다. 실제로 서구의 철학자 스피노자(B. Spinoza)는 그의 주저에서 기쁨을 “정신이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라 정의하면서 정신과 육체에 관계되는 기쁨의 정서를 “쾌감 혹은 쾌활”이라 일컬은 바 있다. 이에 반해 슬픔을 “정신이 보다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이라 정의하고서 정신과 육체에 관계되는 슬픔의 정서를 “고통이나 우울”이라 일컬었다.물론 어떤 개념이 다른 개념과의 관계를 통해 그 의미를 명료하게 드러낸다고 해도 대상의 본질이 제대로 드러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보다 우리가 그 대상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게 될 때 그것은 자기의 얼굴과 목소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슬픔에 관해 말하자면, 어쩌면 슬픔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그 흔한 사랑과 이별을 각자의 삶에서 특별한 것으로 만드는 바깥의 장소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슬픔은 잔혹하게 일그러진 감정이기를 그치고 삶의 예술을 위한 미학적인 장소로 거듭나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탁월한 사례로 4인조 밴드 브로콜리너마저의 기념비적인 앨범인 《보편적인 노래》에 실린 노래들을 들 수 있겠다.달콤 쌉싸름한 슬픔의 맛바닥에 남은 차가운 껍질에 뜨거운 눈물을 부어그만큼 달콤하지는 않지만 울지 않을 수 있어온기가 필요했잖아, 이제는 지친 마음을 쉬어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그때는 좋았었잖아, 지금은 뭐가 또 달라졌지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브로콜리너마저, 〈유자차〉, 《보편적인 노래》, 2008우리는 평범한 일상에서보다도 심한 감기에 걸렸을 때 더 자주 유자차를 찾을 법하다. 실제로 유자차는 비타민C를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어서 기침이나 목 염증을 완화하고 몸의 면역력을 강화하는 데 효과가 있는 것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니 유자차로 환기되는 감기 자체는 사실 누구나 앓을 수 있을 흔한 질병이기에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그보다 이 노래가 짙은 유자차 향을 풍길 수 있는 요인은 유자차를 인생의 감기, 즉 이별로 빗대고 있는 낯선 감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감기가 예측 불가능하게 찾아오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서 이별 역시 그러하고, 우리에게 감기가 일정 시간 앓아야만 나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서 이별 역시 그러하니까 말이다.이 노래에 등장하는 유자차에서는 진한 슬픔의 맛이 우러나고 있다. 그 슬픔의 맛이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이 노래에서는 1절을 남자의 목소리로, 2절을 여자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먼저, 남자는 이별, 즉 인생의 감기에 걸려 오랜 시간을 앓아왔나 보다. 그 시간 동안 그의 입속에선 유자차가 시큼한 맛을 내듯 씁쓸한 맛이 자꾸만 맴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시큼한 맛으로 감기를 이겨내듯 그 또한 눈물을 쏟아붓고 마음껏 우는 방식으로 감기를 이겨내고 있다. 그리고 유자차가 뜨거운 물기를 품고 있듯 그 역시 슬픔에서 우려낸 온기로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그래, 살다 보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말이다.그러면 그 남자와 사랑했던 여자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녀 또한 인생의 감기에 걸렸으나 남자와는 다른 슬픔의 맛을 느끼고 있다. 그녀는 유자차가 달콤한 맛을 내듯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 즉 추억 속에 “켜켜이 묻어” 두려고 한다. 살아가다가 내 마음과는 다른 힘든 순간에 처하게 되면 내 인생의 좋았던 시절을 돌아볼 수 있게 말이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남자에 비해 다소 담담하게 느껴진다. 그에 대해 우리는 남자가 그녀를 더 많이 사랑했다고, 그녀는 남자 모르게 오래전부터 이별을 준비해왔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가 남자의 입장에서 그녀의 비정함을 탓할지도 모르겠으나, 인생의 감기는 사람마다 다른 법이지 않은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유자차에 서로 다른 맛이 뒤섞여있듯이 슬픔에도 서로 대척적인 감정이 뒤섞여있다는 점이다. 즉, 유자차가 달콤하면서도 시큼한 맛을 내듯, 슬픔도 우리에게 그러하다. 우리가 유자차의 맛을 정확하게 구별해낼 수 없듯 슬픔이 우리에게 자아내는 복잡미묘한 감정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대한 정확한 느낌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미 헤어졌으나, 여전히 슬픔의 장소에서는 만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노래에서는 여자의 목소리로 2절이 끝나고 나서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라는 후렴구에서 남자의 목소리를 뒤섞고 있다. 시간이 지나 따뜻한 봄날이 오면 두 사람의 감기는 자연스레 나을 거니까 말이다. 보편적이고 특별한 슬픔의 얼굴보편적인 노래를 너에게 주고 싶어 이건 너무나 평범해서 더 뻔한 노래 어쩌다 우연히 이 노래를 듣는다 해도 서로 모른 채 지나치는 사람들처럼그때, 그때의 사소한 기분 같은 건 기억조차 나지 않았을 거야이렇게 생각을 하는 건 너무 슬퍼 사실 아니라고 해도 난 아직 믿고 싶어 너는이 노래를 듣고서 그때의 마음을 기억할까, 조금은보편적인 노래가 되어 보편적인 날들이 되어 보편적인 일들이 되어 함께한 시간도 장소도 마음도 기억나지 않는보편적인 사랑의 노래 보편적인 이별의 노래에 문득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때, 그때의 그때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건 너무 슬퍼 사실 아니라고 해도 난 아직 믿고 싶어 너는이 노래를 듣고서 그때의 마음을 기억할까, 조금은보편적인 노래가 되어 보편적인 날들이 되어 보편적인 일들이 되어 함께한 시간도 장소도 마음도 기억나지 않는보편적인 사랑의 노래 보편적인 이별의 노래에 문득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때, 그때의 그때그렇게 소중했었던 마음이 이젠 지키지 못할 그런 일들로만 남았어 괜찮아 이제는 그냥 잊어버리자 아무리 아니라 생각을 해보지만보편적인 노래가 되어 보편적인 날들이 되어 보편적인 일들이 되어 함께한 시간도 장소도 마음도 기억나지 않는 보편적인 사랑의 노래 보편적인 이별의 노래에 문득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때, 그때의 그때― 브로콜리너마저, 〈보편적인 노래〉, 《보편적인 노래》, 2008앨범의 제목이기도 한 이 노래는 시인들이 뽑은 노랫말이 아름다운 곡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몇 사람의 견해에 불과하지만, 이 노래 가사가 품고 있는 시적인 것을 반증하는 하나의 근거로 제시할 법하다. 그래서일까. 이 노래에서 반복하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가 있다. 그 하나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보통 사람의 경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일반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특정한 시대와 장소 속에서 한 사람의 경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보편적인’ 것이다. 편의상 이 노래의 주를 이루는 남자의 목소리를 앞서 살펴본 〈유자차〉에 등장하는 남자의 목소리와 동일시한다면, 그의 슬픔은 ‘일반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의 경계에 놓여 있다.먼저, ‘일반적인 것’의 측면에서 그가 느끼는 슬픔은 어떠한가. 그건 그의 고백대로 그와 그녀와의 사랑을 “너무나 평범해서 더 뻔”하고 너무나도 “사소한 기분” 같아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 경험을 한번 생각해보자. 그건 두 사람이 만나고, 영화를 보고, 식당에 가고, 차를 마시고, 산책하고, 여행하고, 사진을 찍고, 다투고, 또 헤어지는 일과 같다. 그건 누구에게나 흔한 일이어서 별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러면 이별의 상황에서 그가 그녀에게 보편적인 노래를 주겠다는 것은 두 사람의 사랑을 남들과 같은 것으로 망각 속에 파묻겠다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랬다면 이 노래는 정말 뻔한 노래가 되었을지 모른다.다음으로, ‘보편적인 것’의 측면에서 그가 느끼는 슬픔은 어떠한가. 그의 말마따나 그건 “그때의 마음”, “소중했었던 마음”을 불쑥 떠오르게 만든다. 물론 앞서 말했다시피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지극히 평범한 일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똑같은 일이라 하더라도 사람마다 수없이 다양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다채로운 기억으로 보존될 수밖에 없다. 그건 누구에게나 특별하고 고유한 것으로 남는다. 그래서 그는 “보편적인 사랑의 노래”와 “보편적인 이별의 노래”를 듣게 된다면, 그 사람이 “문득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때”, 즉 자신에게 특별하게 남은 그 순간에 사로잡히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감정과 무의식이 기억한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경계에 선 슬픔이처럼 슬픔은 우리의 삶에 달콤 쌉싸름한 맛으로, 보편적이고 특별한 얼굴로 스며드는 바깥의 장소와 같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랑과 이별은 그 장소에서 발생하는 불가항력의 사건과 같다. 그러니 우리 각자가 그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의 주인공이기에, 이 세상의 예술은 앞으로도 유독 사랑과 이별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당신에겐 어떠한 노래가 보편적인 노래로 남아 있는가.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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