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재능과 예술가의 삶후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예술가의 재능은 동시대의 현실과 불화한 산물이다. 예술 자체가 애초 기성의 현실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으려는 창조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술가의 의식은 기존의 현실로부터 오는 타성을 거부하고 지금 여기와는 다른 세계를 부단히 꿈꾸는 데 바쳐진다. 이때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현재로부터 미래로 향하는 전위성을 잉태하기 마련이다. 이 전위성은 그의 예술에서 황무지와 폐허로 변한 장소 위에 언젠가 도래할 미래가 거주하게 될 건물 하나 세우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는 이러한 예술가의 사례로 1930년대 다재다능했던 작가 이상(李箱, 1910~1937)을 들 만하다. 그의 짧은 삶에는 각종 분분한 소문이 뒤따르고, 그의 적은 작품에는 각양각색의 많은 해석과 각주가 달려있다.이처럼 현재 속에서 미래의 시간을 미리 살다가는 예술가가 있는 반면에, 현재를 미래의 시간으로 데려가고자 했던 예술가도 있다. 물론 이는 그가 동시대의 현실과 타협하려 한 결과라기보다 그것과 철저하게 불화하려 한 결과이다. 그것보다 그는 비속하고 타락한 현실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지성을 지녔으면서도, 그 현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시대의 아픔과 사람의 고통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감성을 지녔다. 그러니 그의 시선은 현실의 모순을 냉철하게 해부하고 그것에 대담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용감성을 품기 마련이다. 이 용감성은 그의 예술에서 황무지와 폐허로 변한 장소를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이상향으로 탈바꿈하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는 이 예술가의 사례로 화가 이중섭(1916~1956)을 들 수 있다.이른바 국민화가로 알려진 이중섭의 삶에는 국권을 상실당한 일제강점기를 비롯하여 좌우 이념대립이 극화된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굴곡진 역사가 관통해있다. 그러니 그는 생전 한 번도 연필과 붓을 손에 놓지 않는 화가로서 살았으면서도, 그의 그림에는 평화로운 공동체를 파괴하는 외부의 폭력성에 대한 슬픔, 분노, 절망 따위가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린 그림 중 역사적 상황의 혼돈 속에서 살아남은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일종의 가족 찾기와 가족의 보금자리 찾기와 같은 소박한 주제를 엿볼 수 있다. 인간에게 가족과 집만큼이나 원초적이고 절실한 대상이 어디 있을까.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호를 흰 탑을 의미하는 ‘소탑(素塔)’에서 ‘대향(大鄕)’, 즉 대이상향으로 바꾼 사실을 기억할 만하다. 그의 그림을 통해 그가 평생 꿈꾸었던 가족의 모습과 그가 지향했던 대이상향의 정체를 살펴보자.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이상향의 꿈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으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월남하기 전까지 두 번째 고향이라 할 만한 원산에 삶의 터전을 내렸다. 그는 이곳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미술학교와 문화학원에 적을 두고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걸었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에 남달랐던 그의 재능은 유학 중에 점차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전위적인 일본인 화가들이 창립한 자유미술가협회 공모전에서 특별한 신인으로 주목받았고, 심지어 이 단체의 회원이 되어 최고의 영예라 할만 한 태양상을 타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원산에서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를 뚫고 온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신혼살림을 차렸다.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역시 한국전쟁의 비극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해방 이후 북한에 설립된 예술가 단체에서 활동하던 그는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에 의해 우리나라가 분열되어가는 현실을 목도해야 했고, 결국 좌우 이념대립의 갈등이 한순간에 폭발한 전란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엎치락뒤치락하는 전세 속에서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남한군의 배를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그가 어떻게든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다가 당도한 곳이 바로 제주도 서귀포였다. 그곳에서 그는 모처럼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7개월 남짓한 제주도 생활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그가 어떠한 환경에서 살았는지, 그리고 그가 어떠한 이상을 꿈꿨는가를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는 어느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배를 타고 마음껏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때 아이들의 손과 낚싯대가 닿는 곳마다 여러 마리의 물고기가 걸려들고 있고, 모든 아이의 표정에서 평온한 웃음과 천진난만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바닷가는 세상의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있는 풍요롭고 평화로운 세계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실제로 이중섭이 제주도에 살면서 바닷가에서 자주 게와 물고기를 잡아먹었다는 사실로 미뤄본다면, 이 그림에는 피난 시절 그의 가난한 생활 체험이 투영된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작품 외부의 측면에서 이 그림의 상황이 자유롭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위협하고 있는 한국전쟁의 현실에 부당함을 제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이 그림의 맥락을 작가가 처한 현실로 환원하고 마는 것은 결국 그림의 기호와 상징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이 그림에서 엿볼 수 있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그의 그림에서 다양한 장면과 구도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여실한 사례를 일본 유학 시절 그가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랑에 빠졌을 때 보낸 그림엽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까지 90여 점 남아있는 이 그림엽서에는 물론 그가 마사코의 다친 발가락을 치료하는 그림과 같이 사적이고 내밀한 감정이 농후한 그림도 있다.하지만 대부분 그림은 동화적이고 환상적이며 신화적인 분위기를 띤 장소를 담고 있다. 이 그림에서 등장하는 헐벗은 인간들은 바닷가에서 마음껏 물고기를 잡거나 나무에서 탐스러운 열매를 따는 등 가난에서부터 벗어나 있으며, 심지어 인간, 짐승, 자연의 경계에서 벗어나 서로 자유롭게 뒤섞이며 공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위의 그림에서도 헐벗은 아이들은 주황색을, 그 이외의 바다와 물고기는 푸른색을 띠고 있음에도, 이것들은 각자의 영역을 벗어나 서로 연결됨에 따라 강렬한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장소야말로 인간이 문명사회를 이루면서 잃어버린 낙원이라 할 만하다. 이중섭은 인간의 무의식과 인류의 공통감정이 그러한 낙원을 지향하듯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낙원을 향한 강렬한 염원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사라지고 있었다.눈을 씻고 보아도길 위에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한참 뒤에 나는 또남포동 어느 찻집에서이중섭을 보았다.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동경에서 아내가 오지 않는다고,― 김춘수, 〈내가 만난 이중섭〉, 《남천》, 근역서재, 1977이 시를 포함하여 김춘수 시인은 생전 이중섭을 소재로 한 시를 9편 쓴 바 있다. 경남 통영 출신인 그와 이중섭을 묶어 준 매개 고리는 바로 통영이었을 것이다. 이중섭이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늦봄부터 1954년 봄까지 2년가량 통영에서 생활했고, 여기서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소 그림들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중섭이 통영에 머물던 시기에 김춘수 시인은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만났는지를 단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김춘수가 이중섭에 관한 연작시를 발표할 때에 고은의 이중섭 평전을 참고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다만 우리는 김춘수의 시를 통해 당대 예술가들이 이중섭을 바라본 시선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 시에서 김춘수 시인은 이중섭이 동경으로 떠난 아내를 향해 품고 있는 그리운 심정과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절망적인 심정을 대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에서 김춘수 시인은 이중섭을 정확히 두 번 만났다고 하면서 당시 이중섭의 상황과 그에 대한 자신의 인상을 전달하고 있다. 그가 첫 번째 이중섭을 만난 것은 부산 광복동에서였다. 그때 그는 이중섭이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들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이중섭의 아내는 열악한 피난 생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에서 이중섭이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던 모습은 아내를 향한 그의 그리움을, 그리고 그가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발자국도 없이 사라진 모습은 아내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춘수 시인이 두 번째로 이중섭을 만난 것은 부산 남포동에 있는 어느 찻집에서였다. 그때 그는 이중섭이 동경에서 아내가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실의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의 아내가 일본으로 떠나고 나서 한국전쟁 종전 무렵에 그가 극적으로 일주일 동안 일본에 다녀온 것 외에는 결국 가족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시에서 바다처럼 부푼 이중섭의 기대감은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도저한 절망감으로 뒤바뀌어있다. 그는 바다 건너 아내가 있을 곳을 내다보며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하염없이 지우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 모습에서 현실로부터 오는 슬픔과 절망감을 혼자서 삭히며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쓸쓸한 심정을 느낄 법하다.이처럼 당대 예술가들에게 이중섭의 모습은 가족들과 동떨어진 고독한 섬과 같은 처지로 비췄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처지로 인해 그가 초기부터 품고 있던 원초적이고 평화로운 이상향의 꿈은 영원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게 된 것인지 모른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 현존하는 그의 그림 중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도원>(1954)에서 여전히 그가 갈망하고 있는 낙원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앞서 살펴본 그림엽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그림에서도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복숭아밭에서 헐벗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복숭아나무에 올라가 노닐거나 탐스러운 복숭아를 마음껏 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에서 굵직한 선과 화려한 원색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낙원을 향한 그의 강렬한 염원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여정의 끝, 쓸쓸한 죽음같은 해 이중섭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알려진 <길 떠나는 가족>(1954)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는 그일 거라고 생각되는 한 남성이 힘차게 소를 이끌고 있고, 소가 끌고 있는 수레에는 꽃송이와 양식과 함께 그의 가족들이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타고 있는 풍경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을 앞선 <도원>과 나란히 놓고 본다면, 이중섭이 낙원에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대가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헤어진 가족들과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출발점조차 세인의 몰이해와 그의 건강 악화로 인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결국 1956년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병실에서 홀로 눈을 감아야 했다. 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