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이 어느 개인의 소유물인가? 어느 단체의 소유물인가? 어느 정당의 소유물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올해 광복절은 소유물을 찢듯이 갈라졌다. 79년 전 남북으로 갈라졌던 광복이 이번에는 대한민국 내부에서 갈라진 꼴이었다. 누가 어떤 이유를 내세우며 핏대를 올리든 있어서는 안 되는 사단이 벌어진 것이었다.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던 목불인견 뉴스를 지켜본 그날, 기자는 달포 전쯤에 감동적으로 읽었던 책을 다시 꺼냈다. `한흑구 아리아`라는 부제가 붙은 책 <모란봉에 모란꽃 피면 평양 가겠네>이다. 이대환 작가가 한흑구의 문학적 일대기를 통찰하여 아리아 같은 93편으로 정리한 글이 담겼다. 한흑구의 생애를 기나긴 오페라에 비유한다면 책에 나온 93편은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아리아(aria) 같았다. 포항 출신의 그는 <박태준 평전>으로도 유명한 작가다.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나 열 살 때 3ㆍ1운동의 감격과 고초를 목격하고 소년시절부터 문학의 길에 들어선 한흑구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1928년 4월 동아일보에 민족의식 충천한 `인력거꾼`이라는 산문을 발표하고 이듬해 봄날에는 태평양을 횡단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시카고에는 벌써 13년 전(1916년) 함박눈 내리는 밤에 처자식을 평양에 남겨두고 미국으로 망명 떠났던 아버지 한승곤이 기다리고 있었다.1881년에 태어나 평양 산정현교회의 최초 조선인 목사로서 <성신충만>, <사도바울전기>도 저술한 한승곤은 흥사단을 이끈 도산 안창호와 필생의 동지였다. 미국 한인교회에서 사역하며 흥사단 의사부장을 맡아 상해임시정부도 후원하고 20년 만에 귀국하는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아들 한흑구 등과 함께 체포돼 3년여 옥살이를 하고 해방 후 평양을 탈출해 서울에서 1947년 타계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고인에게 훈장을 추서하고----여기서 기자는 `한흑구 아리아` 93편 중 지난 광복절에 새삼 뜻깊게 읽었던 스무번째 아리아 `나이아가라 폭포의 위대한 진리는/흐르고 모이는 합(合)이거늘, 동지들이여!`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1931년 여름, 미국이 대공황의 고난을 감내하는 시절, 고학으로 노스파크대학 영문학과에 다니던 한흑구는 흥사단 자금 마련을 위해 상업(商業) 계획을 세우고 캐나다 토론토로 가는 아버지(한승곤)와 함께 길을 나서서 1931년 8월 1일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걸음을 멈추게 된다. 민족의식, 독립정신, 흥사단 정신으로 무장하고 인간의 자유와 개성이 펼쳐지는 휴머니즘 사상을 영혼에 품은 한흑구는 그 장엄한 위용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시를 읊는다. 시인 화가 철학가 종교가 음악가 영웅 소인 등 `세상을 움직이는 모든 사람아, 너희는 이곳에 오라!`고 폭포 같은 목소리로 외친다. 대체 22세 청년시인이 왜 그랬을까? 시의 마지막 연에 뜻이 담겼다. 위대하다! 나이아가라여! 너는 오로지 이 땅의 남성이로다! 흐르고 합하고 모이어 네 몸을 이루었나니ㅡ 이 진리, 이 교훈만은 내 이제 깨달았도다.이대환 작가는 1931년 9월 17일 미주한인신문 신한민보에 처음 발표된 한흑구의 시 `나이아가라폭포여`에 다음과 같이 해설을 붙여뒀다. 시인은 무슨 연유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나이아가라 폭포로 불러 모으려는가? 한흑구의 본심은 특히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을 그곳으로 불러 모으고 싶었을 것이다. 피 끓는 시인은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그리고 고국에서도 분열을 멈출 줄 모르는 그들을 그곳에 모두 다 집합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폭포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일갈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물줄기들의 합(合)이 창조한 천품이란 사실을, 당신들도 나처럼 똑똑히 보란 말이오!"   일제강점 암흑기에 끝내 `단 한 줄의 친일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의 반열에 변영로, 오상순, 이희승, 윤동주, 이육사, 김영랑, 조지훈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린 한흑구는 해방된 평양이 소련군과 김일성의 `붉은 도시`로 돌변하자 목숨이 위험하여 급거 서울 문단에 합류하고 미군정청 고위 통역관을 지낸 뒤, 해방조국이 기어코 분단독립으로 갈라지자 미련없이 세속적 명리를 등지고 1948년 11월부터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낯설은 땅 포항에 붙박힌다. 날마다 송도 해변을 거닐며 바다와 갈매기의 언어를 켜켜이 영혼에 쌓는 은둔의 사색가로서 `보리` `노목을 우러러보며` 같은 불후의 명작 수필을 남기고 포항 정신문화의 기반을 놓아준 한흑구는 인생 후반기 서른한 해를 꼬박 포항에 살고 1979년 11월 향년 70세로 눈을 감았다. 올해 11월 7일은 어느덧 한흑구 선생 45주기를 맞는다. 최근 기자와 막걸리 한잔을 나눈 이대환 작가는 "그날 포항시민이 가만히 있겠는가? 갈매기 나래 위에 인생과 문학과 세계에 대한 사유의 언어를 띄우고 또 띄웠던 최초의 진정한 영일만 친구를 위하여!"라며 잔을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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