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의 층위와 증언의 주체외부의 끔찍한 폭력성에 노출된 인간은 자기 경험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가 살아있는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명이기에 개인적으로 중요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그는 시시때때로 현재를 잠식하는 지옥과 같은 과거로부터 자신을 구출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말과 글에는 처절한 울부짖음과 핏물이 베여있다. 또한 증언은 그가 공동체를 이루는 역사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에 사회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매끄럽고 단일한 역사에 거칠고 다양한 주름을 새겨놓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말과 글에는 예리한 칼날과 땀방울이 들어가 있다.이처럼 증언은 한 개인을 일으켜 세우는 실존의 동력이 되거니와 그를 다시 사회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된다. 그 결과 그는 가까스로 외부의 폭력성이 남긴 내적 상처와 정신적 고통과 대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는 수많은 사람이 여지없이 죽음에 내몰리는 상황에서 자기만 살아남았다는 비참함에 시달릴지 모르고, 자신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친 자들에게서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가 가진 상처와 고통은 결코 치유할 수 없을 테지만, 그는 그 치유할 수 없음과 마주함으로써 겨우 치유의 물꼬를 트게 된다. 절망을 절망으로 마주하는 방식으로 말이다.또한 그의 증언은 현재의 시선을 과거로부터 돌려서 다가올 미래로 향하게 한다. 그가 자기 몸을 관통해간 외부의 폭력성을 목격한 이상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가 앞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외부의 폭력성이 인간을 파괴하는 조건을 뒤바꿔야 하며, 적어도 다음 세대에게는 그가 겪은 상황에 노출되지 않는 세상을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는 그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타인의 관심과 사회적인 제도가 충분히 뒷받침될 때 가능한 일이다. 이러할 때 그가 지닌 거대한 절망은 아주 미세한 희망으로 전환될 여지가 생긴다.이런 점에서 증언이란 순전히 과거의 사실을 기록하는 행위가 아니라 개인에서 사회에 이르는 복합적인 사정을 건드리는 행위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증언에는 호환될 수 없는 다양한 목소리가 뒤섞여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이것의 사례로는 이탈리아 태생의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19~1987)의 증언을 들 수 있다.그 하나의 목소리는 자기가 겪은 현실로 다시 뛰어 들어가 자신이 겪은 경험을 고스란히 들려주는, 자기의 목소리이다. 프리모 레비가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자마자 기본적인 생존권뿐만 아니라 최후의 존엄성까지 박탈당한 상황에서 이것이 과연 인간다운 모습이고 생활인가 하고 탄식하는 목소리가 그러하다. 이 순간 우리는 그의 진실한 목소리에 감정이입을 하여 한 인간을 오롯이 이해하려고 애쓸지 모른다. 또 하나의 목소리는 자기가 겪은 현실의 바깥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을 객관적으로 들려주는, 타자의 목소리이다. 프리모 레비가 동료로부터 인간을 동물로 격하시키려는 그들의 행위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들은 것이 그 사례라고 할 만하다. 이때 우리는 그의 침착한 목소리에 공명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진정한 인간성을 수호하려고 애쓸지 모른다.이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증언과 마주하게 될 때 그것을 구성하는 복합적인 층위와 그것을 전달하는 다양한 주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우리가 아우슈비츠에 관한 증언 문학을 살펴볼 때 결코 간과하지 못할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루마니아 태생의 독일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 1920~1970)이다. 그는 루마니아의 체르노비츠에서 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점령함에 따라 이곳의 유대인들은 여지없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또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중 부모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으나, 우연이랄지 요행이랄지 가스실 처형을 면하고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다. 그러니 우리는 그가 얼마만큼 비참한 심정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오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살아갔을지 이루 헤아릴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아우슈비츠 이후 뭔가 쓰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을 테고, 그러다가 아우슈비츠를 문학으로 증언하는 일이 그의 일생일대의 과제가 되었을 법하다고 짐작해볼 수는 있겠다. 이제 그가 남긴 시를 통해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자.언어창살로 나뉜 두 개의 자아창살 사이의 안구(眼球).섬모충 눈꺼풀이위로 노 저어 가시선 하나를 틔워 준다.유영하는 아이리스, 꿈 없이 우울하게,심회색(心灰色) 하늘이 가깝구나.갸름한 쇠 등잔 속, 비스듬히,천천히 타는 희미한 관솔 등화(燈火).빛 감각에서너는 영혼을 알아본다.(내가 너 같았으면. 네가 나 같았으면.우리 한 무역풍 아래서 있지 않았던가?지금은 낯선 이들인 우리.)타일들. 그 위에바싹 붙어 있다, 두 개의심회색 물줄기.두 개의입안 가득한 침묵.― 파울 첼란, 〈언어창살〉, 전영애 옮김, 《죽음의 푸가―파울 첼란 시선》, 민음사, 2011이 시에서 파울 첼란은 언어창살에 의해 두 개의 자아로 쪼개진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인 언어창살은 원래 중세 수도원의 면회실에 있는 창살문을 가리키며 이것을 사이에 두고 수도 중인 사람과 외부 면회자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번역자가 이를 창살문이 아닌 언어창살이라고 탁월하게 번역한 것은 창살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두 대상 간의 소통과 단절의 상황을 동시에 환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에서 유일하게 괄호로 처리된 5연에서는, 이제 ‘나’와 ‘너’로 분리된 우리가 언젠가 과거에 “한 무역풍 아래” 서 있던 “우리”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그럼에도 지금은 너와 내가 “낯선 이들”이 되어버린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심정이 동시에 나타나 있다.왜 그럴까. 우리는 번역자의 의향을 존중하여 그에게 왜 언어가 창살이 되어버렸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질 법하다. 그만큼 이는 파울 첼란이 문학 활동을 시작하면서 본명 안첼(Ancel)의 철자를 재배열하여 첼란(Celan)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정체성과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였다. 이에 대한 단서를 우리는 그가 사용한 언어가 독일어였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첼란의 고향인 체르노비츠는 옛 합스부르크 왕가의 변방으로 독일어를 쓰는 지역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독일어는 어머니로부터 자연히 습득하게 된 모국어이면서도 자기 가족을 비롯하여 유대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학살자의 언어이기도 했던 것이다.그러니 우리의 눈앞에는 창살문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자아가 독일어로 대화를 나누는 섬뜩한 풍경이 그려진다. 이때 창살문의 안쪽에 있는 자아에 대해 모국어를 쓰는 나로, 창살문의 바깥에 있는 자아에 대해 학살자의 언어를 쓰는 나로 상정해보면 어떨까. 가장 먼저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일종의 죄책감이나 죄의식과 같은 기분을 느낄 법하다. 그가 자기 민족을 오로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짓밟은 학살자의 언어를 쓰고 있으니 모국어를 쓰는 나에게 그러한 심정을 느끼는 건 지극히 당연하니까 말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의 목소리로부터 일종의 분노나 증오와 같은 기분을 느낄 법하다. 그들이 자기 민족을 처절한 죽음에 이르게 한 역사적 사실을 고발하기 위해서는 학살자의 언어를 쓸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파울 첼란이 죽기 전까지 독일어로 시를 썼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의 시는 초기에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경향을 띠다가 점차 길이가 짧아지면서 무질서와 무의미를 불러일으키는 언어에 가닿고 있다. 학살자의 언어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결국 그를 구석으로 내몰아 자기 목을 조르고 말 것처럼 말이다.   살육의 기억과 구원의 장소 그들은 파고 또 팠다, 그렇게 하여그들의 낮이 가버렸고, 밤 또한 갔다. 그들은 신을 찬양하지 않았다,그들이 듣기로 이 모든 것을 뜻했다는 이그들이 듣기로 이 모든 것을 알았다는 이.그들은 팠으며 더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그들은 지혜로워지지 않았다, 노래를 지어내지 못했다,그 어떤 언어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그들은 팠다.정적이 왔다, 폭풍도 왔다,온갖 바다들이 왔다.내가 파고, 당신이 파고, 버러지도 팠다.하여 저기 노래하고 있는 것이 말한다, 저들이 파고 있다고.오 한 사람이 오, 아무도, 오 그 누구도, 오 당신이.그 어디로도 갈 곳이 없었는데 어디로 가 버렸을까?오 당신이 파고 내가 팠다, 내가 파서 당신에게로 가니,우리들 손가락에서 반지가 눈을 뜬다. ― 파울 첼란, 〈그들 속에 흙이 있었다〉, 전영애 옮김, 《죽음의 푸가―파울 첼란 시선》, 민음사, 2011이 시에서 파울 첼란은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대량 학살되는 현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시 전반에 등장하는 ‘그들은 팠다’라는 말만큼이나 당시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언어가 어디 있을까. 나치에 의해 고안된 강제 수용소는 철저하게 유대인들을 소모하는 시스템이 가동하던 곳이었다. 그들을 마치 짐승처럼 몰아넣은 열차가 도착하고 나면, 그들은 곧바로 전쟁의 물자를 생산할 만한 노동력을 갖추고 있는가에 따라 여성, 아이, 노인과 남성으로 분류된다. 별반 쓸모가 없는 존재에게 더 이상 밥을 줄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다. 건장한 남성들도 예외는 아니다.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해 자칫 큰 부상을 입었다거나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건 그들이 더 이상 쓸모없어졌다는 증거일 뿐이다.익히 알려졌다시피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방식은 땅에도 있었고, 하늘에도 있었다. 그중 하나로 그들은 자기가 죽을 무덤을 직접 파야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 앞에 꿇어앉아서 학살자의 총이 목덜미를 관통하는 순간 여지없이 구덩이 속으로 파묻혀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에서 ‘그들이 팠다’라는 것은 그들이 임박한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절망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음으로 그들은 집단으로 가스실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한 다음 화장터의 검은 연기로 사라져야 했다. 비좁은 땅에 파묻히는 것보다 드넓은 하늘에 파묻히는 것이 조금은 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그를 유명하게 만든 시 〈죽음의 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결국 강제 수용소는 한쪽에는 처절한 생존이, 다른 한쪽에는 비참한 죽음이 있는 곳에 불과했다. 거기에는 더 이상 한 줄기 빛이 스며들만한 구원조차 없었다. 그들은 그전까지 세상 “모든 것을 뜻했다”고, 세상 “모든 것을 알았다”고 믿었던 이, 즉 “신을 찬양하지 않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제 엄습할지 모를 죽음의 공포에 짓눌린 채 자기가 파묻힐 무덤을 파고, 또 파는 것이었다. 당신이 파던 곳을 내가 파서 당신에게로 간다는 건 죽음에 죽음을 겹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마지막에 그가 “우리들 손가락에서 반지가 눈을 뜬다”고 말한 것을 위로이거나 연대이거나 부활이라고 쉽사리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아우슈비츠 이후의 고통파울 첼란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 고향 체르노비츠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시인이자 번역가로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돌연 1970년 4월 어느 날 센 강에 투신자살하여 그를 끈질기게 괴롭혔을 아우슈비츠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그로부터 17년 뒤에 아우슈비츠 생존자이자 증언자인 프리모 레비 또한 이탈리아 토리노의 한 아파트에서 그의 뒤를 따랐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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