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에게 삶의 길을 물었다청춘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 중 아마 노래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세대마다 다르겠지만, 분명 노래는 한 시절을 뜨겁게 달구는 힘을 내장하고 있기에 순수와 열정을 뿜어내는 청춘의 심장에 상응한다. 돌이켜보면 필자 역시 그러했다.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시기는 불안과 기대 속에서 새 밀레니엄으로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대학생들의 사회 참여 통로였던 운동권이 점차 퇴조하는 등 대학가의 공동체 문화가 다른 방식으로 전환되던 때였다. 이때 필자는 이른바 노래패에 들어가 시위 현장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의 입에 올랐던 민중가요를 불렀다. 김민기의 〈아침이슬〉, 〈철망 앞에서〉, 〈상록수〉 등이 그때 불렀던 노래 목록에 들어있었다.하지만 필자는 당시 불렀던 노래 중 대부분 그 내용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던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노동해방, 조국 통일 따위의 메시지를 머릿속으로 이해했으나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 망치와 같은 구호 하나로 세상이 바뀔 수 있겠는가. 그것보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좋았을 뿐이다. 그저 악보를 수놓은 멜로디에 따라 가사를 흥얼거리다 보면 거기서 알 수 없는 위안과 용기를 얻었으니까 말이다. 그로 인해 노래와 같은 문화적 양식이 사람의 마음과 정서적인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상당한 힘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그러다가 필자는 최근에 왜 나의 청춘을 노래라는 형식에 기대려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건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노래에게 물었던 것에서 연유했다. 바로 얼마 전 김민기의 부고 소식을 듣고 다시금 그의 노래를 꺼내 들었던 게 그 대답의 계기가 되었다. 그 노래 속에서 청춘의 김민기 역시 불확실한 앞날을 내다보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묻고 있었던 게 아닌가. 이를테면, 그는 여러 갈래로 나뉜 길 위에서 길은 끊임없이 길로 이어진다는 진실을 발견하고 있고(〈길〉), 또 이른 새벽길에서는 어둠을 떨치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과 마주하기도 하고(〈새벽길〉), 심지어 천리길을 의연하게 걸어가면서 자연과 사람이 생기있게 뒤섞이는 풍경을 목도하기도 한다(〈천리길〉).그러니 김민기의 노래는 길을 묻고 또 길을 찾는 여정 속에서 탄생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달리 보자면, 우리가 길을 묻는 건 결국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 맞닿아 있어서 그의 노래는 궁극적으로 인생의 길을 향한 모색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아마도 우리의 뇌리에는 소포클레스가 남긴 불멸의 비극 《오이디푸스의 왕》 또한 신성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길을 뼈대로 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릴 법하다. 김민기의 노래가 낡지 않고 오래도록 사람들의 입에 오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독재정권을 향한 저항의 산물이라거나 노동자의 의식을 대변하는 메가폰으로서 김민기의 노래를 제약하지 말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렇게 하기에는 그의 노래는 너무나도 나직하고, 소박하고, 더디고, 깊고, 섬세하고, 담담하고, 고적하고, 서글프고, 또 천진난만하지 않은가. 물론 그가 분명 권력기관의 탄압으로 인해 예술적 신념 자체를 부정당했고, 정상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삶을 살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한 인터뷰에서 “노래엔 음악 내면의 고유한 메커니즘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극단적인 이념 틀로 몰아가고자 하는 것은 파국밖에는 기다리는 것이 없다.”라고 내뱉은 말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노랫말을 통해 그가 더듬어간 길의 정체를 음미해보는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 될 것이다. 이때 아래의 노래는 그가 지향한 여정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고유성끝 끝없는 바람저 험한 산 위로나뭇잎 사이 불어가는아 자유의 바람저 언덕 위로물결같이 춤추는 님무명무실 무감한 님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지녀볼래 지녀볼래물결 건너편에황혼에 젖은산 끝보다도 아름다운아 나의 님 바람뭇 느낌 없이진행하는 시간 따라하늘 위로 구름 따라무목(無目) 여행하는 그대인생은 나 인생은 나― 김민기, 〈바람과 나〉, 한대수 작사·작곡, 《김민기》 1집, 1971주지하다시피, 이 노래는 김민기와 가까운 사이였던 한대수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 만들어 그에게 선사한 곡이었다. 이 노래는 1집 앨범에서 번안곡 한 곡을 제외한다면 유일하게 그가 만들지 않은 곡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상징성을 띠면서도, 어쩌면 일찌감치 김민기의 노래가 인생의 방향성을 찾아가는 도중에 있다는 것을 엿본 이가 한대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한대수는 과연 김민기의 노래에서 어떠한 인생의 여정을 엿본 것인가.우리는 일면 이 노래에서 현실로부터 오는 어떠한 제약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마주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노래의 어조는 비교적 단순하고, 그 메시지는 또렷하다. 이 노래에서 화자는 바람을 인격적 대상인 ‘님’으로 호명하면서 그가 몸소 실현하고 있는 절대 자유와 천진난만함의 경지를 동경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건 바람을 향한 동경의 반대편, 즉 그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은 그것과 거리가 먼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겠다. 어떠한 대상에 대한 결핍감이 커질수록 그것을 향한 동경 또한 커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그에게 바람은 인생 자체가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향해 가는 “여행”으로 비췄을 법하다.물론 이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은, 반만 맞는 해석에 불과하다. 그것과 함께 우리는 이 노래에서 인생의 방향성에 귀감이 될 만한 자연의 이치를 살펴보면 어떨까. 그러한 의도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실현되고 있다. 바로 바람은 접속사에 의해 나와 동등한 위상을 부여받고 있기에 우리는 바람을 통해 어떠한 존재론적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1절에서 “험한 산”, “나뭇잎”, “언덕”과 같은 주변 자연물과의 관계에 따라 바람이 무색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리고 2절에서는 “황혼”, “하늘”, “구름”과 같은 주변 환경과의 관계에 따라 바람이 무욕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따라서 김민기는 이 노래에서 바람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나의 고유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진실을 발견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나의 주체적인 모습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진실을 터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깨달음은 노래의 끝에 나오는 “인생은 나”라는 두 마디에 집약되어 있다. 그러니 김민기는 한대수가 만들어준 노래를 부르면서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에서 인생의 방향성을 찾으려 했다는 점을 확인한 셈이다.자연이 가르쳐 준 생명의 길그러면 자연은 스승으로서 김민기에게 어떠한 삶의 지혜를 일깨워주었는가. 우리가 김민기의 노래를 향해 던질 법한 질문이다. 물론 그의 인생 수업은 자연의 교실에 널려있는 여러 가지 평범한 자연물이나 사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은 자연과 인간에게 공통된 생명 일반의 세계로 확장되고 있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단순히 자연 친화적이라기 보다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며, 또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아래의 노래가 그러하다.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김민기, 〈아침이슬〉, 김민기 작사·작곡, 《김민기》 1집, 1971이 노래는 사람들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모이는 현장에서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곡 중 하나이다. 하지만 김민기는 애초 이 노래를 운동가요로 만들 목적이 전혀 없었고, 언젠가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걸 보고서 더 이상 자신의 노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당시 권력기관은 이 노래를 불온한 노래로 만들어버렸고, 김민기를 이른바 사회 풍속에 반하는 위험인물로 낙인찍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간과하지 말아야 할 몫으로 남아 있으나, 정작 이 노래의 깊이에 가닿기 위해서는 간과해야 할 점이기도 하다. 그보다 우리는 이 노래에서 진정한 삶의 길을 찾기 위해 고뇌하던 한 인간이 생명 진화라는 보편적인 과업을 찾아 나서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 노래에서 화자는 “풀잎”과 같은 특정한 자연물로부터 생명체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가 낮과 밤, 음과 양과 같은 상극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거니와 생명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살아 움직이는 과정에서 그러한 상극성과 자연스레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노래에서 “풀잎”은 생명을 위축시키는 “긴 밤”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고, 그에 반해 생명을 약동시키는 “아침”과는 조화를 이룰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아침 이슬”은 단순히 시련과 역경 따위를 극복한 결과물이라기보다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와 생명 작용이 서로 긴밀하게 맞물리며 나타난 산물이 아닌가.그러니 이 노래에서 화자는 “풀잎”을 계기로 하여 사사로운 내적 고뇌와 사적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진실을 배우고 있다. 요컨대, 이는 자연이 고정되거나 안주하거나 정체되지 않고 부단히 유동하거나 변화하거나 생성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는 점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이러한 점을 딱딱한 지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전환하고 있다. 바로 그는 노래에서 그의 현실을 “태양”이라는 생명의 요소와 “묘지”라는 죽음의 요소 간의 대립 구도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죽음과 같은 비생명의 대상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이처럼 그가 자연으로부터 생명의 이치를 배운 이상, 한 자리에 머무르고 있을 수는 없다. 그는 한 생명체로서 그것을 몸소 실현하기 위해 “저 거친 광야”로 떠난다. 아마 이 광야는 이전의 그를 내적 번민에 빠트린 인간 세상을 의미할 것이다. 그가 자연으로부터 상극의 요소가 세계를 운행한다는 사실을 배운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세상 또한 수많은 대립과 상극의 요소가 뒤섞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서러움”과 같은 기존의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내적 성숙을 꾀한 한 인간으로서 그곳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가 정확하게 두 번 반복한 “나 이제 가노라”라는 외침은 “저 거친 광야”의 문을 두드리는 출사표와 같다.청춘의 후기물론 우리는 그가 그곳에서 혁명가로서 삶을 살았는지, 혁명의 절정에서 주저앉고 말았는지 그의 행방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겠다. 그가 과거의 나와 결별하고 주체적인 나를 자각한 것 자체가 새 역사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끝으로 자연에게 배운 다음과 같은 지혜를 통해 내 청춘을 힘껏 북돋아 준 고 김민기의 명복을 빌고 싶다.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김민기, 〈상록수〉, 《김민기》 3집, 1992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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