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인과 시인 사이의 길지극히 당연한 말이겠지만 시인은 시인이기 이전에 일종의 생활인이다. 물론 이는 그가 순전히 밥벌이를 위한 생존경쟁의 현장에 들어가 있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생활은 그가 한 인간으로 설 수 있는 실존의 근거가 되고 그의 문학적인 상상력에 생생한 현실성을 불어넣는 원천이 된다. 그러니 그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숙명과 마주하는 것처럼 매 순간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생활세계(Lebenswelt)로부터 눈을 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생활로부터 오는 비속함에 빠지지 않도록 늘 염려해야 하고, 어떤 때에는 영영 이곳을 벗어날 작정으로 어딘가 있을지도 모를 외부의 장소를 꿈꾼다. 그곳은 내가 무한정 다른 존재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펼쳐지는 몽상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에게 생활인과 시인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배타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그가 생활인과 시인이라는 두 영역 사이에 시(詩)라는 어두컴컴한 터널을 구축해 놓은 이유이다.한국의 시인 중 생활인이자 시인이라는 정체성을 뚜렷하게 자각한 시인으로 우리는 김수영(1921~1968)을 들 수 있겠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그는 한국전쟁 당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좌우 이념대립으로 인해 하루에도 숱한 사상자가 속출하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우여곡절 끝에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전후 한국의 현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떤 방면에서도 서구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은 곳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러한 낙후성에 대해 무지한 지성인이 판을 치는 곳이었다.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세상을 향한 실망에 사로잡힐 법하지만, 김수영은 섣부른 냉소주의로 극심한 허무주의를 봉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현실의 맨얼굴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겠다’라고 출발점에서부터 선언했다(〈공자의 생활난〉). 그리고 그는 시인으로서 “아름다움”과 같은 정체된 세계에 안주하기보다 비록 타락했을망정 부단히 유동하는 현실에 몸을 내맡기기 위해 “세상에 배를 태고 날아가는 정신”을 자신에게 명령했다(〈바뀌어진 지평선〉). 이때 우리는 그가 당면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보조를 맞추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너의 복무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것과 같은 이상적 정신 또한 잃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그러니 다소 과장되겠지만 우리는 김수영 시가 창작될 수 있었던 지분의 절반을 그가 당면한 현실에,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그가 변화하는 현실을 포착하는 정신에 배당할 수 있겠다. 실제로 그는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인 객관적인 현실에서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正視)”할 수 있는 지혜를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한 그는 만년에 이르러 이러한 지혜를 “이것을 흘러가는 순간에서 포착할 때 이것은 고민이 아니다. 모든 사물을 외부에서 보지 말고 내부로부터 볼 때, 모든 사태는 행동이 되고, 내가 되고, 기쁨이 된다.”라며 자기 생활의 지침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준다(〈생활의 극복〉).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활인과 시인이 데칼코마니와 같이 겹치는 영역에 들어와 있다.이처럼 이 글에서 문득 생활인과 시인을 겹쳐보게 된 것은 한 시인의 첫 시집을 펼쳐보게 된 일에서 연유하였다. 사실 이 시집에서는 나무나 그것과 유관한 소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를테면, 시인에게 나무는 바람과 친밀한 관계성을 형성하며 바람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대상(〈불망(不忘)〉)이거나 쓰러져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밥 먹고 사는 일”과 같이 “한 무리의 꽃”을 피워 낸 대상이기도 하다(〈숨〉). 그리고 그에게 나무는 “사람의 숲”으로부터 생겨난 상처를 달래는 “외로움”이 깃드는 대상(〈숲에 들다〉)이거나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한 가슴에 “높이는 깊이에서 나온다고” 일깨워 주는 대상이기도 하다(〈숲의 전언〉).
이런 점에서 김겸 시인에게 나무는 생활인이자 시인의 상징이며, 그의 시상이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실상 나무는 대지로 표상되는 현실과 허공으로 표상되는 이상을 동시에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시는 현실-생활인과 이상-시인의 양극단에 관한 균형 감각과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에 삶의 진실에 값하는 탁월한 역설을 생산해낸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시는 현실-생활인과 이상-시인의 두 축을 활발하게 오가는 순환 운동을 형성하고 있기에 고통스러운 현실에 다른 시공간이 열릴 구원의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 실제 그의 작품을 들여다보자.
쓸모없음이 가진 고유성의 빛때를 잘못 만났다있지만 소용에 닿지 못하는 것그럼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력을 다해증명하고 있는 저 희미한 얼굴내가 전심전력한다는 것은결국 저 낮달 같은 것세상은 이미 휘황한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쓸모없음을 열심으로 증거하는 것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저 빛 가운데강물처럼 잔잔히 부서져도 좋을 것을촘촘한 잎새로 눈부시게 부서져도 좋을 것을밤이 오면 광명할 것인가그때를 대비해 빛을 머금고 있는가쓸모없음이 어둠 속에서는 귀한 것이 되는가창백한 낮달,한낮의 나를 증거하고한밤의 나를 기망하네그것은 어두워져야 비로소빛을 발하는 것벌레 같은 내가한밤중에 책상에 앉아마침내 홀로 환해지는 것― 김겸, 〈낮달〉, 《하루 종일 슬픔이 차오르길 기다렸다》, 여우난골, 2022이 시에서 시인은 “낮달”을 통해 생활인이자 시인으로서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다. 왜 하필 “낮달”인가. 바로 그건 “낮달”이 세상의 가치평가 기준으로 볼 때 “쓸모없음”의 것으로 폄하된 대상이면서 시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일시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서구 구조주의자들의 작업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인간은 이 세계를 이분법적 관점에 따라 재단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한낮”-‘태양’이라는 개념을 호명하고자 할 때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그 반대편에는 “한밤”-‘달’이라는 대립항이 상정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이 세계를 객관적·합리적 태도로 해부하려는 명분을 가지고 있으나, 거기에는 이 세계를 일정한 방향으로 틀 짓는 가치평가의 태도가 개입해 있다.이렇게 볼 때, “낮달”은 세상의 평가 기준에서 한참 미달한 형태에 불과하지 않은가. “한밤”에 속해야 할 대상이 “한낮”에 떠올라 있는 것은 정상적인 범주를 이탈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낮달”과 같은 존재에 대해 ‘모자란 것’이라는 폭력적인 판정을 내린다.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우리가 “낮달”을 바라보게 될 때 “낮달”이 품은 빛은 세상의 평가 기준에서는 별반 생산적인 효용성을 지니지 못한 것이라 치부되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는 이미 “한낮”의 쓸모에 값하는 “휘황한 것으로 가득 차 있기에” “낮달”의 희미한 빛은 그것들과의 경쟁에서 번번이 패배하게 될 것이다.그럼에도 “낮달”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비관하거나 억울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쓸모없음을 열심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은 왜 그럴까. 그건 “낮달”이, 아니 그것과 동일시하는 시인이 “때를 잘못 만났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채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시인은 “낮달”이 처한 상황을 세상의 평가 기준과 같은 ‘고정된 사실’로 보기보다는 언젠가 ‘때를 만날’ 가능성을 지닌 변화의 과정에 따라 바라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보자면, “낮달”은 머잖아 도래할 “밤”을 대비해 “빛을 머금고” 있는 것이고, 실제로 “낮달”은 “어두워져서야 비로소” 환한 빛을 뿜어내게 될 것이다.그러니 우리는 시간적인 관점에서 “낮달”의 모자람, 즉 결여가 결국 충만함, 즉 잉여와 통하는 세계에 진입해있다. “낮달”의 입장에서 보자면, “낮달”은 우리가 쓸모라는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력을 다해/ 증명”하고 있다. 이때 그가 품고 있는 희미한 빛이란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가 충만한 고유성의 빛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심코 지나쳐 버리고, 또 이 사실이 쉽사리 망각 속에 파묻혀 버리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진실을 말해준다. 무지로부터 오는 망각보다 방관으로부터 오는 망각이 더 위험하지 않은가.흥미롭게도 김겸 시인은 그러한 망각에 빠져들지 않도록 몇 가지 생활의 지침을 마련하고 있다. 그 하나는 말의 형식을 가지고 출현한다. 그건 다름 아니라 “어떡하지”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표면상 우리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막막함을 보여주는 것이겠으나, 김겸 시인에게는 상실감이나 억울함과 같은 늪에 빠져들지 않도록 자신을 구원하는 매개가 된다(〈귀로〉). 또 하나는 글의 형식을 가지고 출현한다. 그건 바로 “끝없이 펼쳐진 눈밭”에 “단지(斷指)한 손가락”으로 “너”라는 미지의 존재에 대해 쓰는 행위를 통해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다(〈설원(雪原)〉). 그러니 그는 삶을 추동하고 존재를 탐구하는 나름의 방식을 고안했다고 볼 수 있으나, 아직 말하지 못한 생활 지침이 하나 더 있다.슬픔이라는 양식과 다른 존재로의 열림 하루 종일 슬픔이 차오르길 기다렸다차곡차곡 쌓이는 슬픔을 알면서 부러 내버려 둔 것이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울음을 참는 것과 같아서인내 같기도 하고분투 같기도 한데슬픔을 참는 일에 익숙해지면가수가 성대를 관리하듯내 마음을 내가 조절할 수 있을 것만 같고새로운 감정의 휴경지가 생겨날 것 같아서내버려 두었다슬픔이 차올라 스스로 말할 때까지내가 나를 종일토록 지켜보고내가 나를 면벽하도록이렇게 견디고 견디면먼 길 달리는 마라토너의 심장도생길 것 같아하루를 산 나를 나독이며책상에 다가 앉으며내 다리 위에 고개를 파묻고 잠자는작은 강아지의 체온을 뜨겁게혈액에 담는다내가 준 사료가 너의 먹이였듯하루 종일 차오른 슬픔이나의 사료였구나― 김겸, 〈나의 사료〉, 《하루 종일 슬픔이 차오르길 기다렸다》, 여우난골, 2022또 다른 생활의 지침 중 하나는 슬픔을 생활의 양식이자 시의 양식으로 삼는 것이다. 사실 우리 각자에게는 수많은 자아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각자는 그러한 자아들이 집적된 복합적인 존재이다. 시에서는 이를 편의상 두 개의 “나”로 마주 세우고 있으나, 이 글의 흐름에서 보건대 그것은 각각 생활인과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아를 둘러싼 우리의 과제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자신에게 속한 자아들이 각자의 자리에 걸맞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그들이 서로 매끄러운 조화를 이뤄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자아들은 서로를 길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애완동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시에서 그는 나날이 “먹이”를 주며 보살피는 “작은 강아지”에 대해 말하고 있기도 하다.이때 그가 생활인으로서 자신에게 주는 “사료”가 바로 “슬픔”이다. 왜 그러한가. 먼저, 그건 우리가 자기 생활에 너무 깊숙이 빠져들지 않도록 제어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삶의 바닥 가까이 빠져든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그때 자기를 망각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누구나 자신에게 제일 먼 존재가 바로 자기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에게 “먹이”를 준다는 건 자기를 관조하는 시간을 갖는 것과 같다. 다음으로, “슬픔”은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하는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경험을 통해 터득하지 않았는가. “슬픔”을 피하지 않고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이 그것을 넘어서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말이다.물론 김겸 시인은 “슬픔”을 시의 양식으로 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 “슬픔”과 마주할 때 다른 시공간으로 열리게 될 존재의 가능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에서 그가 “슬픔을 참는 일에 익숙해”짐에 따라 성대를 관리하는 “가수”의 세계와 접하고, “먼 길 달리는 마라토너의 심장”을 접하는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나라는 투명한 시공간”을 실어 나르는 “기차”(〈다른 시간, 다른 곳에〉), “주소도 없는/ 무허가 건물”(〈수취인 불명〉), 그리고 “아무런 증명도 얻지 ”못하는 “미확인 물체”(〈증명 불가〉)와 같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존재의 불특정함은 그의 시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 처절하게 살아남아 있는 낮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이제 우리는 앞서 말했던 김겸 시인의 나무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지점에 와 있다. 어쩌면 그의 나무를 키운 건 생활인이자 시인으로서 삶이었고, 또 그들의 양식이었던 슬픔이 그 나무의 퇴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나무는 사시사철 다양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우리의 눈과 마음을 풍성하게 하리라.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