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관한 오해를 찾아서일생에 걸쳐 진정 한국인을 사랑했던 한 일본인이 있다. 바로 일본의 사상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 당시 일제가 조선 민중을 무력으로 무참하게 진압하는 행위를 목도하고서 피식민지 민족의 입장에 서서 이를 비판하는 글을 신문에 실었던 인물이었다. 물론 이는 일시적인 충동에 사로잡힌 행동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그는 불모지 같은 조선 문단의 건설에 앞장섰던 염상섭, 남궁벽, 오상순 등과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도자기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으니까 말이다.이런 야나기 무네요시가 한, 중, 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삼국의 미학을 정립하려 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동아시아 삼국의 예술품에 관한 세심한 관찰을 토대로 하여 형태가 돋보이는 중국의 예술에서는 힘의 미를, 그리고 색이 돋보이는 일본의 예술에선 즐거움의 미를 읽어냈다. 또한 그는 유난히 선이 돋보이는 조선의 예술에서는 비애의 미를 읽어내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나는 조선의 예술, 특히 그 요소로 볼 수 있는 선(line)의 아름다움은 실로 사랑에 굶주린 그들 마음의 상징이라 생각한다. 아름답고 길게 길게 여운을 남기는 조선의 선은 진실로 끊이지 않고 호소하는 마음 자체이다. 그들의 원한도, 그들의 기도도, 그들의 요구도, 그들의 눈물도 그 선을 타고 흐르는 것같이 느껴진다. (…중략…) 눈물로 넘쳐흐르는 갖가지 호소가 이 선에 나타나 있다. 그들은 그 적막한 심정과 무엇인가를 동경하는 괴로운 정을 아름답고도 잘 어울리는 길고 우아한 선에 담아낸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 사람을 생각한다〉, 심우성 옮김, 《조선을 생각한다》, 학고재, 1996여기서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예술에서 볼 수 있는 “선(line)”을 조선 민족성의 표현이라 보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조선의 민족성을 파생한 연원으로 한반도의 특수한 지리적 요건과 유구한 역사적 내력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가 보기에 3천 년에 이르는 조선의 역사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의 억압과 지배를 받은 세월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니 조선 민족은 끊임없는 외침에서 오는 비극적인 감정을 안으로, 안으로 삭히고 삭혀 도자기에서 볼 수 있는 곡선과 같은 비애의 상징을 만들어낸 것이다. 바로 그에게 조선 민족을 이해하는 길이란 그러한 곡선에 흐르고 있는 비애의 호소를 있는 그대로 수긍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물론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 예술에 대해 보여준 애정 어린 시선은 당시 대부분의 일본 지식인이 무력을 앞세운 식민지 동화 정책을 묵인하거나 그것에 동조하였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그 자체로 귀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숱한 비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학적 관점을 이루고 있는 논리적 지반의 편협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것은 그가 조선 예술의 미로 거론하고 있는 비애의 아름다움을 이른바 외부 환경의 산물로 귀결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가 조선 민족에게 보여준 인정과 동정 같은 것이 결국 식민지라는 생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라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제출한 비애의 미라는 것이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촉발된 반동 감정이나 원한 감정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엿보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그에게 과연 인간에게 비애 또는 슬픔이 그렇게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인 감정이기만 한 것인지에 대해 되물어야 한다. 어쩌면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우리는 실제로 그와 만난 적은 없지만 그와 동시대에 호흡하고 있었던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아래 시에서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슬픔을 종결하지 않으려는 사랑의 자세당신은 무슨 일로그리합니까?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파릇한 풀포기가돋아나오고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가도 아주 가지는않노라시던그러한 약속(約束)이 있었겠지요날마다 개여울에나와앉아서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가도 아주 가지는않노라심은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김소월, 〈개여울〉, 《진달래꽃》, 매문사, 1925이 시에서 화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이별의 상황에 놓여 있다. 이는 시에서 두 차례에 걸쳐 나타나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이라는 시어를 통해 알 수 있고, 그만큼 그에게 이별이 뜻하지 않은 일이었고 또 적잖은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는 것과 같이 곳곳에서 만물이 탄생하고 “봄바람”이 잔물결을 헤적이는, 생동하는 봄이 와도 그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다. 오히려 이와 달리 그는 이별의 선고가 내려진 시공간에 정체되어 있으며, 특히 물살이 빨리 흘러가는 “개여울”은 그가 거스를 수 없는 앞날의 시간을 현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앉”는 행동에 대해 떠나간 이를 향한 헛된 미련을 보여주는 거라고 우리가 매도해도 크게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를 좀 더 세심히 들여본다면 그가 처한 상황을 일반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끝내 변하지 않을 사랑의 자세를 자신에게 묻고, 또 그것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먼저, 그는 자기의 내면에서 분리되어있는 두 자아와 대화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바로 1연에서 그가 “당신”이라고 호명하는 대상은 말 그대로 다른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홀로이”, 즉 자기 혼자서 “개여울에 주저앉아” 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의 내면에 분리되어있는 자아를 각각 연인과 이별을 맞이한 나,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본래의 나라고 볼 수 있으며, 후자의 나가 전자의 나를 향해 말을 거는 상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떠나간 이를 향한 미련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가’라고 말이다.다음으로, 그는 연인이 자신을 떠나가 버린 현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떠나가 버린 연인이라든지, 아니면 그 사람과 보낸 과거의 시간이라 말하지 않고 “무엇”이라는 불특정한 의미를 담은 대명사를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잘 알겠지만, 사랑은 두 사람의 몫이지만 이별은 각자의 몫이 아니던가. 그러니 이별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로 충만해 있던 자리가 텅 비어버리는, 부재나 공백의 상황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걸 그는 분명 “무엇”이라고 지시하면서 연인의 부재를 승인하는 한편, 여전히 연인에 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자세를 내비친다. 바로 시에서 2연, 3연, 4연은 연인과 이별을 맞이한 내가 본래의 나의 질문을 향한 대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미 발표한 시를 여러 차례 손질했기로 유명한 김소월이 이 시 또한 한 차례 개작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김소월은 이 시를 자신의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었던 《진달래꽃》에 넣기 3년여 전에 같은 제목으로 《개벽》이라는 잡지에 발표했다. 두 시를 비교해보면, “가긴 가도”에서 “가도”로, “무엇을 잊자 합니다”에서 “무엇을 생각합니다”로, 그리고 “굳게굳게”에서 “굳이”로 시어가 변화한 점이 눈에 들어오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은 발표작에 있었던 마침표가 시집에 들어간 시에서 전부 빠져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지극히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이 현상을 무엇을 말하는가.한국어 문장에서 마침표는 한 문장의 의미를 끝맺는, 종결의 역할을 구현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김소월이 발표작에서 마침표를 삽입한 의도는 화자가 처한 이별의 상황을 종결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가 시집에 들어간 시에서 굳이 마침표를 뺀 의도는 화자가 처한 이별의 상황을 유예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 차이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파생할 만큼 크나큰 현상이다. 이때 전자의 화자가 내비친 이별의 슬픔이 수동적인 차원에 가깝다면, 후자의 화자가 내비친 이별의 슬픔은 능동적인 차원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그래서 후자의 화자는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은 여전히 올곧은 것이고 진실한 것이라고 말하는 게 귓가에 스친다.또다시 처음으로 슬픔을 시작하는 노래따라서 우리가 김소월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본다면 슬픔이라는 게 결코 야나기 무네요시의 입장처럼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치환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김소월에게 슬픔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사랑의 자세를 지킬 수 있는 동력이 되었으니까 말이다.흥미롭게도 김소월의 시는 백 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대중의 사랑을 받는 동안 여러 차례 노래로 만들어지고 불렸다. 〈개여울〉의 경우 영화 《모던 보이》(2008)에서 댄서로 등장하는 조난실(김혜수 역)이 눈부신 주렴을 드리운 무대에서 부르는 장면이 적잖이 알려져 있으나, 필자는 특히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둘》(2017)에 수록된 〈개여울〉이 원시의 정서를 유난히 잘 살린 노래라고 생각한다. 이 노래에선 1절에서 시의 1연부터 5연까지를 부른 다음, 2절에서는 3연부터 5연까지 부르고 나서 다시 1연으로 돌아가 1행과 2행을 부르며 끝맺는다. 이별의 슬픔을 유예하려는 김소월처럼 이 노래 역시 이별의 슬픔을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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