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흑구 탄생 115주년을 맞는 2024년 늦봄, 한흑구의 문학적 일대기를 93편의 작은 이야기로 엮어낸 책이 나왔다. 편마다 인용한 작품과 그 상황을 통찰한 저자의 안내를 따라가면서 마치 해설을 곁들인 아리아 93곡을 감상하듯이 읽을 수 있다. 라는 부제가 붙은 신간 『모란봉에 모란꽃 피면 평양 가겠네』이다. 저자는 포항 출신으로 『박태준 평전』도 쓴 이대환 작가(66세)다.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난 한흑구(본명 세광, 世光)는 숭인학교를 나와 1929년 2월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중퇴한 데 이어 5년여 미국 유학을 하고 시인, 소설가, 수필가, 번역가로서 1934년 봄날에 평양으로 돌아왔다. 신문은커녕 잡지 하나 없는 ‘조선 제2 도시 인구 16만 평양’의 전근대적 현실을 개탄하며 종합지 《대평양》, 《백광》 창간과 발행을 주도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가운데 1937년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한승곤(아버지) 등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다. 그 뒤부터 평양을 떠나 평남 강서군 산골에 칩거하며 일제의 회유와 압박을 거부하고 “단 한 편의 친일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친일문학연구자 임종국)로 남았다. 그러나 해방된 고향(평양)이 적도(赤都)로 바뀌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38선을 넘어 1945년 9월 서울 문단에 합류했다.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지내다 대한민국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늦가을부터세속적 명리와 등지고 일가친척 하나 없는 영일만 바닷가 포항에 정착하여 인생 후반기 서른한 해에 걸쳐 갈매기와 바다의 언어를 영혼에 담는 ‘은둔의 사색가’로서 문학적 정혼을 수필 창작에 기울였다. 그의 바람대로 포항제철(포스코)이 ‘조국의 번영’을 이끄는 ‘영일만 신화’를 완성한 즈음인 1979년 11월, 70세 일기로 자택에서 고요히 영면에 들었다. 책 제목은 첫 번째 아리아 <애인보다 가까운 조지훈과 함께/다시 모란봉에 올라보고 싶지만>의 한 문장에서 따왔다. 1950년 8월 15일, 광복 5주년에 41세 한흑구는 아내와 같이 어린 자녀 넷을 데리고 포항에서 출발해 꼬박 한 주일을 걸어 부산의 동래 다리 밑에 닿았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피난의 고행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수영비행장에 주둔한 미군 지휘부의 통역관이 되어 공초 오상순, 조지훈, 청마 유치환 등 종군 문인들의 저녁 술자리를 책임지는 임무에 충실히 나선다. 그해 10월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문인 대표들도 평양으로 날아가게 되자 조지훈은 평양 토박이 한흑구에게 동행을 강권한다. 이때 그가 사양하는 말이 이랬다. “나는 모란봉에 모란꽃이 피면 평양에 가겠네.” 이 장면을 저자는 이렇게 읽어낸다.그날부터 한흑구는 평양을 영혼으로만 살아가야 했을까. 모란봉에는 모란꽃이 피지 않는다. 모란이 없기 때문이다. 한흑구는 현실에서 평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모란봉에는 언제나 모란꽃이 피어나는 중이다. 모란봉이란 피어나는 모란꽃을 닮아서 매겨진 이름이라니! 두 번째 아리아는 <아버지는 창끝에 찔려 넘어졌고/나와 동무는 도망하여 나왔노라>이다. 한흑구가 열 살 때(1919년) 경험한 3·1운동을 24세의 미국 유학생이 되어 1933년 3월 9일 《신한민보》에 발표한 시 「3월 1일」을 인용하고 있다. 세 번째 아리아는 <함박눈 내리는 날 지게꾼이 오고/어머니는 소리 없이 울었네>로, 한흑구가 일곱 살이었던 어느 날에 아버지(한승곤)가 중국(상하이)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 떠나는 장면이다. 이후로는 그의 유년시절부터 1979년 11월 그의 임종과 장례를 담은 아흔세 번째 아리아 <흰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러/검은 갈매기는 영일만 바닷가 흙 속으로>까지가 시계열에 어긋남 없이 빠짐없이 그의 작품을 현장의 증언처럼 인용하면서 정연하게 이어진다. 한흑구의 문학적 일대기는 네 번째 아리아 <‘High thinking, plain living’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혜성’을 결성해 문학의 길로>의 소년 한흑구에서부터 1934년 봄날에 어머니의 병환을 돌보기 위해 미국 유학을 그만두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 횡단 여객선 ‘후버’호에 오르는 서른일곱 번째 <한글 시 200편과 영시(英詩) 100편을 쓴 청년시인이/최초로 필명 ‘흑구’를 《신한민보》에 올리고 나서>, 평양 자택에 도착한 한세광(흑구)의 소식을 알려주는 서른여덟 번째 아리아 <‘심장의 노래’를 다짐한 청년시인의 귀국 소식을/《조선일보》가 크게 특필하다>, 서른아홉 번째 아리아 <식민지 조국에 돌아와/문학의 길로 정진하겠다는 한흑구의 자화상>까지는 주로 그의 시를 불러들이고, 마흔 번째 아리아 <‘헐어지는 집’에 돌아와 휘트먼을 호출하고/16만 평양시민의 종합지 《대평양》을 창간하다>부터는 주로 그의 산문을 불러들인다. 한흑구의 문학이 귀국, 귀향을 계기로 산문시대로 넘어간 것이다.   1948년 늦가을에 세속적 명리를 멀리하는 한흑구가 솔가하여 낯선 땅 포항에 출현하는 모습은 예순한 번째 아리아 <포항시 남빈동의 낡은 집을 둥지로 삼는/검은 갈매기>에 담겨 있다. 포항에 정착한 그는 월트 휘트먼, 칼 샌드버그, 랭스튼 휴즈 등 미국 대표 시인들의 시를 번역해 번역시집 『현대미국시선』을 펴내고(1949년, 서울 선문사), 세계적 음악가로 애국가와 ‘코리아 판타지’를 작곡한 안익태를 가형처럼 도와주며 함께 지냈던 필라델피아 템플대학 유학 시절을 A와 K라는 주인공으로 내세운 장편소설 「젊은 예술가」도 발표하지만(1961년 《새길》, 법무부 간행), 1955년 4월 18일 《동아일보》에 발표한 시적 수필의 명작 「보리」가 보여주듯이 문학적 정혼을 수필 창작에 기울이며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문》 《영남일보》 《현대문학》 《시문학》 《수필문학》 등 다양한 여러 매체에 많은 수필을 발표했다. 그 결실이 회갑도 넘겨 1971년 미당 서정주 시인의 주선으로 생애에 처음 펴낸 작품집(수필집) 『동해산문』과 두 번째 수필집으로 1974년에 펴낸 『인생산문』(서울 일지사)이다. 한편으로 한흑구는 포항수산대학 교수로서 후학을 길러내며 이명석, 김대정, 박영달, 최성소, 김녹촌, 손춘익 등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손을 잡고 전후의 폐허를 극복하는 포항에서 ‘흐름회’를 조직해 학생백일장을 주최하고 황순원, 이원수 등 친분이 두터운 문학인들을 초청해 문학강연회를 개최하면서 문학운동의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미국 유학, 일제강점기, 해방공간에 남겨둔 한흑구의 문학적 자취에서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아리아는 음악가 안익태와 함께 보낸 시간, 최초로 조선문단에 올려놓은 미국 흑인문학과 주목할 수필문학론, 그리고 소설가 이효석, 시인 유치환·조지훈·서정주 등 문우들에 대한 추억담이다. ‘청년시인 한흑구와 청년음악가 안익태’는, 1933년 2월 신시내티에서 추방 위기에 몰린 빈털터리 안익태가 첼로만 들고 돌아갈 여비도 없이 필라델피아 정거장에 나타난 장면을 담은 스물여덟 번째 아리아 <갈 곳 잃은 안익태가 첼로만 들고/필라델피아 한흑구의 셋방에 들다>부터 서른일곱 번째 이리아 <안익태의 ‘고립’을 넘어선 런던 편지와/‘독립’을 이룩한 연미복의 지휘봉>까지 내리 이어진다. 한흑구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문단에 최초로 미국 흑인문학을 올려놓았다. 스물네 번째 아리아 <한국문학사에 최초로 흑인문학을 올려놓으니/조선 문단은 데면데면 엑조티시즘으로 여기고>에서 그 단면을 알려준다. 1932년 2월호 《동광》에 한세광의 이름으로 발표한 평문 「미국 니그로 시인 연구」가 그것이다. 앨런 로크(Alain Locke)가 편집한 문학선집『뉴 니그로』가 그 텍스트로, 『뉴 니그로』는 ‘니그로 르네상스’ 촉발의 한 자극제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 흑인의 상황에 식민지 조선인의 상황을 대입한 한흑구는 당시 대표적 흑인 시인 랭스튼 휴즈의 시 ‘우리는 우리의 해가 돋는/우리의 땅을 가져야 한다’라는 「우리의 땅」도 번역해 소개했다. 하지만 조선 문단은 ‘미국 니그로 문학’을 이국적인 정서나 정취에 탐닉하는 엑조티시즘 정도로 여겼을 수 있다. 그러나 한흑구는 미국 흑인의 상황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흑인문학을 일생 동안 가슴에 간직했다. 1937년 5월 《백광》에 발표한 그의 단편소설 「황혼의 비가」에도 흑인문제를 포함한 인종 차별의 현장이 생생히 등장한다. 흑인을 노예처럼 동원한 텍사스 목화농장에서 노동을 팔아 학비를 준비하는 한인 고학생 ‘나(김)’와 ‘박’이 겪은 이야기를 그려내는 「황혼의 비가」는 마흔네 번째 아리아 <암탉이 달걀을 품듯이 소설을 창작하며/다시 ‘황혼의 비가’를 듣다>에서 들려주고 있다. 한흑구는 일제강점기 한국 수필문학의 선구자로서 특히 영미 에세이의 역사와 작품들을 일목요연하게 통찰한 지식을 바탕으로 단단한 ‘수필문학론’을 피력했다. 쉰아홉 번째 아리아 <문학의 장르로서 수필의 독자적 가치와 양식을/한국문학사에 개척하고 정립하다>에서 그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또한 한흑구 아리아에는 가까이 지낸 문인들과의 농후한 추억들이 담겨 있다. 마흔아홉 번째부터 예순네 번째 사이의 <낙엽을 태우며《백광》에는 수필만 넘겨주고/평양냉면을 싫어한 소설가 이효석>, <일제 검열관이 빨갛게 지워버린 방송 원고와/노총각의 결혼>, <해방공간의 한흑구가 서울에서 대작한/대주가(大酒家)급 문인들>, <한흑구의 영혼에 ‘생명의 서’를 새기고/‘바위’로 남은 청마 유치환>, <푸른 자기(磁器)의 선(線)에서/슬픈 역사를 읽어낸 지훈이여>, <“한 형, 나 아직 주정 안 했지?” 하고/히히 웃는 ‘귀촉도’ 시인> 등이 그것이다. 마흔 살을 앞두고 솔가하여 포항에 정착한 한흑구는 ‘향수’에 휘둘리지 않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전후 폐허의 포항을 재건할 때는 미군의 도움을 불러오는 일을 조용히 해내고, 다시 일어서는 포항의 기상을 전국에 알리는 글을 쓰는가 하면, 문학적으로 척박한 터전에 씨앗을 심고 밭을 가꾸는 일에도 앞장서는 가운데, 일찍이 1935년 7월 《조선중앙일보》에 ‘수필문학론’을 분재한 당시에 “나는 조선문단에 수필문학의 새 기운을 촉진하고자 한다”라고 밝혔던 자기 다짐을 실천하는 길로 나아가 시적 수필의 명작으로 빛나는 「보리」, 「노목을 우러러보며」 등을 남겼다. 그러나 70세에 다가서며 생의 종점을 예감하는 한흑구는 가슴 깊이 봉인해둔 향수 주머니의 실밥이 터져 버린다. 그래서 글로 만든 ‘평양 안내지도’라 불러도 손색없을 「모란봉의 봄」 같은 수필을 쓴다. 아흔 번째 아리아 <꽁꽁 봉인해둔 침묵의 향수(鄕愁)에/속절없이 그만 실밥이 터지고>이다. 저자는 이렇게 읽어낸다. 자주 말하는 애절한 그리움도 있을 수 있다. 길게 말하는 애절한 그리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안으로 안으로 우겨넣으며 깨물고 또 깨물어 견고한 침묵 속에 봉인해두는 애절한 그리움이 있다. 이것이 한흑구의 ‘평양 향수’였다. 그러나 애절한 그리움을 완벽하게 봉인해줄 침묵이 어찌 있을 수 있으랴. 봉인의 실밥이 속절없이 터져 버리는 찰나를 맞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포항 바닷가를 거닐며 황혼의 시간에 쓴 수필「나는 한 마리 갈매기요」에서 한흑구는 스스로 ‘갈매기’로 등장하여 드디어 갈매기는 떠돌이 방랑자가 아니라 터를 잡고 정착한 새라고 불러준다. 그가 발표한 마지막 글은 1979년 10월 《샘터》에 실린 「신용이 광고다」이다. 마지막으로 도산 안창호 정신을 선양한 것이기도 했다. 아흔두 번째 아리아 <갈매기같이 살겠다며 마지막으로/도산 안창호를 호출한 ‘검은 갈매기’>가 그것을 담고 있다. 그리고 한흑구는 1979년 11월 지상의 마지막 음식으로 냉면을 맛보고 나서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유택 자리는 영일만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포항시 죽천리 언덕이었다. 아흔세 번째 아리아 <흰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러/검은 갈매기는 영일만 바닷가 흙 속으로>이다. 겨울을 예감하는 하늘이 눈 시리게 푸른 빛으로 고스란히 내려앉은 영일만 바다,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 위로는 갈매기들이 꺽꺽한 소리로 서로를 부르며 마치 오랜 친구와 영영 헤어지는 영결의 슬픔을 나누는 것 같은 그때, 음유시인의 풍모를 갖춘 대중가수 최백호의 노래 <영일만 친구>는 ‘수평선까지 달려 나가는 젊은 날 푸른 가슴’과 가슴을 타고 이 나라 방방곡곡 ‘갈매기 나래 위에 시를 적어 띄우는’ 중이었다. 갈매기 나래 위에 인생과 문학과 세계에 대한 사유의 언어를 띄우고 띄우고 또 띄운, 최초의 진정한 ‘영일만 친구’는 필생의 그 과업을 내려놓았고……. 이대환 작가는 한흑구의 문학적 일대기를 세상에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여기는 저명 작가마저 상업적, 정파적 이유로 그의 뽐내는 말과 그의 삶이 서로를 배반하는 경우가 흔해 빠진 통속의 무대다. 일제강점시대의 평양, 대공황기의 미국, 해방공간의 서울, 전쟁ㆍ전후(戰後) 분단시대의 포항에서 핍박과 궁핍의 세월을 빳빳이 관통해온 선생의 궤적은 말과 삶의 일치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참으로 귀중한 유산이다. 그리고 포항에서 서울까지 363킬로미터이고 백두산까지래야 두 배도 못 되는 672킬로미터인데, 언젠가 평양 사람들이 포항에 와서 선생을 기억해주고 남녘 사람들이 모란봉에 올라가 선생을 추억할 그날이 올 것이라 믿고 기다리며 이 책을 선생의 영전에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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