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인이 되었을까이른 아침부터 한 청년이 다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현관문을 두드린다. 곧 잠옷 차림의 한 노인이 등장하고, 청년은 그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다.“전 사랑에 빠졌어요.”“심각하진 않아, 치료약이 있어.”“치료되고 싶지 않아요. 계속 아프고 싶어요.”이 청년이 바로 영화 〈일 포스티노〉(1996, 2017 재개봉)의 주인공 마리오 루폴로(마시모 트로이시 역)이고, 그 노인은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필립 느와레 역)이다. 애초 이 영화는 파블로 네루다가 사회주의에 가담한 혐의로 이탈리아의 한 작은 섬마을로 망명하게 되고, 거기서 그의 전담 우편배달부인 마리오 루폴로가 그와 우정을 쌓아가면서 시인으로 성장해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화에서 ‘마리오 루폴로는 어떻게 시인이 되었을까’하는 점에 주목할 수 있을 텐데, 그 돌출적인 국면 중 하나로 위의 장면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면에서 마리오는 사랑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생전 처음 체험하고 있으며, 사랑의 대상이 아닌 다른 이에게 사랑의 상태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내부에 침투한 치명적인 감정을 오롯이 받아들이고서 이에 상응하는 멋진 표현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상에서 발을 떼고 길을 잃기바로 이 지점은, 시적 언어가 상투적인 인식에 기대는 일상적인 언어를 비틀어서 낯설게 하는 방식으로 탄생한다는 사실을 그의 체험으로 보여준 장면이라서 특별하다. 그러면 우리가 이 지점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그전까지 ‘마리오 루폴로는 과연 시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가’하는 점일지 모르겠다. 이에 관한 실마리를 우리는 영화를 모티프로 한 아래의 시에서 찾아보자.자전거를 타고 양재천을 달린다 소요(逍遙)의 페달을 밟으며 루체른 로이스 강가를 달린다 아이거 북벽이 보이는 그린델발트 언덕을 넘어 몽생미셸 해변을 달린다 바람아, 내 고독의 돛을 힘껏 밀어라 흐르는 물처럼 자전거의 길은 낮게 웅크린 모든 것들을 그윽하게 어루만지며 낮은 데로 낮은 데로 임한다 자전거의 길은 스스로 길이라 말하지 않는다 가로막는 산과 다투며 터널을 뚫지도 않는다 자전거의 길은 언제나 우회한다 에움길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직설이 아닌 다만 은유로 존재한다 스치는 바람의 감촉아, 은유로 이루어진 길 위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행복하여라 이 길은 시를 운반하는 우체부의 길이다 난 하염없이 그 우체부를 기다릴 것이다 프로방스의 햇살과 별들의 소리를 녹음한 테잎을 든 그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유하, 〈일 포스티노―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3〉, 《천일마화》, 문학과지성사, 2000흥미롭게도 이 시에서는 마리오가 시를 이해하기 이전에 이미 그의 자전거가 시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어쩌면 이는 그에게 시를 알려준 네루다는 교과서와 같은 존재였고, 자전거야말로 그에게 시의 본질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길을 알려준 선생님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사실 영화에서 마리오는 우연한 기회에 네루다에게 시를 배우기는 한다. 영화 초반부에 그는 호기심에 네루다의 시집을 읽고서 그에게 메타포(은유)라는 신기한 말을 배운다. 네루다는 이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것에 비유하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서 “하늘이 운다”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예시를 들려준다. 이는 충분히 교과서적인 내용이기에 이를 통해 마리오가 시적 언어를 이해하였을 리는 만무하다.또한 마리오는 한적한 바닷가에서 네루다가 들려주는 바다에 관한 시를 통해 운율이라는 전문 용어를 배운다. 그는 네루다에게 시에 대한 자신의 기분을 “배가 단어들로 이리저리 튕겨지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하지만, 이 역시 그에게는 불확실한 앎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우리는 그러한 네루다의 말을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그의 자전거에게 시를 묻는 것이 좀 더 나은 길이라고 생각할 법하다. 왜 그러한가.첫 번째로, 자전거는 우리가 지상에 있으면서도, 지상에서 조금 멀어질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해준다. 말하자면, 자전거는 평소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의 사물과 풍경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선사해준다. 바로 우리가 자전거에 앉는 순간 일상생활에선 감춰져 있던 “내 고독의 돛”이 활짝 펼쳐진다. 이 순간 우리는 항상 거닐던 “양재천”이 “루체른 로이스 강가”, “아이거 북벽이 보이는 그린델발트 언덕”, 그리고 “몽생미셸 해변”과 같은 이국적인 장소로 변모하는 기분을 만끽하게 된다. 이처럼 자전거는 마리오보다 먼저 시적 언어가 일상의 우리를 색다른 시공간으로 밀어 넣는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두 번째로, 자전거는 우리가 오히려 “길을 잃”음으로써 시의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길은 좀 더 정확하게 “은유로 이루어진 길”이며, 이는 지고지순한 자전거의 “운명”과도 정확하게 닮아있다. 시에서는 이를 “흐르는 물”에 빗대 주로 두 가지 측면에서 보여준다.먼저, “자전거의 길”은 “흐르는 물처럼” 관대함과 포용성을 띠고 있다. 우리가 흔히 상선약수로 알다시피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면서 본성상 “낮게 웅크린 모든 것들을 그윽하게 어루만”지지 않는가. 자전거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방으로 열린 길을 누비면서 자신의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풍경과 일체화되는 것이 “자전거의 길” 아니었던가. 다음으로, “자전거의 길”은 “흐르는 물처럼” 겸허함과 순응성을 띠고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물은 애초 완전히 침묵에 가까운 목소리를 지녔고, 항상 “우회”하는 길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자전거 역시 그러하다. 자전거야말로 “스스로 길”이라고 자기 목소리를 내세우지 않으며 “가로막는 산과 다투며 터널을 뚫”는 생존경쟁의 논리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가.이에 따라 시인은 “자전거의 길”이 개방성, 합일성, 우회성 등의 측면에서 현실 논리의 바깥으로 나아가게 될 때 시의 목적지에 가까워질 거라고 보고, 그 길을 “은유로 이루어진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은 시를 운반하는 우체부의 길”이라며 자전거가 눈치채고 있는 시의 본질을 마리오가 어서 알아채기를 바라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서두에서 언급했다시피, 마리오는 우체국에서 네루다의 집으로 오가던 일상의 길을 벗어나 베아트리체에게 이끌렸을 때 “자전거의 길”로 처음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후 그의 행적을 살피기 위해 역시 영화를 모티프로 한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바깥의 시선으로 삶을 들여다보기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태동(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 번호에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신촌역(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 황지우, 〈일 포스티노〉,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이 시에서는 마리오가 자전거로부터 충분하게 시를 배우고 난 뒤 자전거를 내려오게 된 상황을 말해준다. 실제로 영화의 중반부를 지나면 마리오가 허공에 머무는 시간보다 지상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는 걸 보여준다. 물론 마리오가 자전거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칠레 당국에서 네루다 시인의 체포영장을 기각함에 따라 네루다 시인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우편배달부로서 그의 직업을 잃게 된 상황에서 연유하였다.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하나 있다. 이는 바로 마리오가 이제 자전거로부터 터득한 “바깥”의 시선으로 자기 삶의 터전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이 사실 하나가 진실한 앎을 꼭 행동으로 옮기고야 마는 마리오를 비극의 절벽으로 몰고 갔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애초 우리가 안에만 익숙해진 시선으로 바깥을 내다볼 때는 좀처럼 안의 실상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바깥을 체험한 시선으로 안을 들여다볼 때는 그동안 우리가 간과해오던 것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니까 말이다.바로 이때 마리오의 시선에는 섬마을의 균열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들어왔다. 이 중에서 균열의 경우 섬마을은 식수와 같은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고, 부유층이 가난한 어부를 대수롭지 않게 착취하고 있으며, 또한 정치인이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이용해 자신의 잇속을 채우기만 하는 곳으로 그의 눈에 비쳤다.그럼에도 섬마을은 작은 파도, 큰 파도, 절벽에 부는 바람, 나뭇가지에 부는 바람,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신부님이 치시는 교회의 종소리,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파블리토의 심장소리 등 아기자기한 매력이 넘치는 곳으로 그의 눈에 비쳤다. 그는 결국 네루다가 남긴 녹음기에 이러한 것들을 담아냄에 따라 섬마을의 아름다움으로 섬마을의 균열을 봉합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이 지점에서 그는 어느새 시인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미 시인이자 아직 시인인 마리오하지만 그는 끝내 비극의 시인으로 남게 될 운명이었나 보다. 지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가 사회주의 집회에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상황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전에 그가 자전거에 머물면서 사방으로 열린 바깥을 만끽했던 시절이 얼마만큼 자유로웠을지 생각하게 된다. 어쨌든 애초 네루다 시인이 마리오를 자전거에 올라서게 한 계기가 되었으니 그 역시 마리오의 죽음에 일종의 “가해자”일지 모르겠다.마지막으로, 영화 촬영 12시간 뒤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마리오를 시 한 편 없는 시인으로 만들어준 고(故) 마시모 트로이시에게 이 글을 바친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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