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장소와 성찰의 장소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꿈꾼다. 그러면서 비속한 이곳과는 다른 자유로운 곳을 내다보지만, 그곳은 우리의 시야가 닿을 수 없을 만큼 요원하기만 하다. 어쩌면 구원이란 까마득한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뿌리내리고 있는 이곳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르며, 사실상 이곳의 우리에게 가장 먼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니던가. 그러니 우리 각자가 구원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먼저 안개에 가려진 자기의 발견이라는 필수적인 과제를 수행해야만 한다. 물론 이는 유대교의 신비주의, 즉 카발라에서 전해져오는 이야기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크게 특별한 것은 아니다.그 사례를 우리는 현존하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전하는 발터 벤야민에 관한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발터 벤야민이 “진정한 카발라주의자”인 그의 친구에서 들은 것으로, “메시아의 왕국에 대한 유명한 우화”이다. 바로 이 이야기의 요점은, 장차 도래할 메시아의 왕국이 이곳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는 것, 그곳은 이곳의 장소와 생활과는 크게 다를 바 없고, 다만 “아주 약간만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아감벤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주석을 덧붙이고 있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새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우화가 메시아적 세계에 도입하는 그 미세한 전위에 해당한다.― 조르조 아감벤, 이경진 옮김, 《도래하는 공동체》, 꾸리에, 2014여기서 아감벤은 기존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과, 기존과는 미세하게 다른 것이 언뜻 보면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둘 다 이곳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곳을 지향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자의 자리바꿈 혹은 위치 바꿈은 질적으로 현저하게 다른 차이를 보여준다. 전자가 결국 기존과는 아예 다른 새로움 그 자체를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면, 후자는 기존의 현실에 미세한 균열을 내는 전위성 자체를 지향점으로 삼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자는 우리에게 실현 불가능하며 극적인 차원의 구원에 가깝다면, 후자는 실현 가능하며 잠재적인 차원의 구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왜 그렇지 않겠는가. 구원을 향한 절실함의 차원에서 본다면 아주 사소한 한 뼘의 거리가 우리를 항상 난처하게 한다. 사실 우리는 평상시 일상의 요구에 시달리며 틀에 박힌 생활에 자신을 내맡기며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안에 수많은 자아가 공존하는 장소를 숨긴 채 일상생활에 걸맞은 단일한 자아를 가장하며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 마음속으로는 숱하게 그 흔한 비행기표 하나 끊으려고 하다가 자주 단념하는 것처럼, 정작 자신의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딛기가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연한 기회에 한 걸음을 떼고 보면 기존의 현실에서 느끼지 못했던 낯설고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바로 기존의 현실에 묶여있던 나에게서 분리된 또 다른 내가 기존의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진정한 삶을 살고 있느냐고.물론 앞서 아감벤이 말하는 메시아의 세계는 단순히 물리적인 차원에 속하는 자리바꿈뿐만 아니라 인식론적 차원에 속하는 자리바꿈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무리 물리적 차원에서 내가 이동했다고 해도, 기존의 자기로부터 내가 분리되었다는 상황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기존의 자기에게 가려져 있던 삶의 진실을 내다보지 못한다면 별다른 변화를 이루지 않은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구원의 장소는 서로 다른 자신이 상대방을 비추는 성찰의 장소라고 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거울의 매개는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이 글은 그중 하나로 마침 요즘같이 바깥으로 나가기 좋은 때에 한 번쯤 가볼 만한 곳인 부석사를 들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경북 영주시에 위치한 부석사는 신라시대의 고승인 의상이 10년간의 당나라 유학을 통해 깨우친 화엄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불교적 세계를 탁월하게 구현한 장소라고 할 수 있겠으나, 종교만큼 우리의 누추한 삶을 돌보고 거기에 고결한 호흡을 불어넣는 성찰의 장소는 없을 것 같다. 이에 따라 우리가 부석사에 관한 시를 읽어보는 것은 우리 삶 속에 놓인 구원의 장소를 탐색하는 의미심장한 일이 될 것이다.세계의 유한성과 삶의 반짝임한 시절 반짝임 푸른 무량이어서청록 지천만큼이나 탕진 끝없을 줄 알았는데어느새 센머리 허옇게 뒤집어쓴겨울 소백산맥 바라보며외사촌 아우 빈소 자리로 가고 있다.눈발이나 희끗거릴 바람의 마력이라면힘껏 던져도 부풀릴 수 없는 바위 꿈매양 처지는 길뿐이겠느냐.어떤 필생을 거기 매달았다 해도지금은 헐벗은 가지들 그 떨림만으로고스란히 눈꽃을 받들고 있다.눈구덩이에 처박힌 바퀴 빼내려고질척거리는 발밑 다잡다 보면여기 어디 뜬 돌 위에 지어진 절 이정표가 섰었는데산모퉁이 몇 번 다시 감돌아도겹겹 등성이만 에워쌀 뿐 절은 안 보인다.안 그래도 금세 함박눈 차폐되어 가로막는데그 막 안에 또 내가 갇혔다. 부석사뜬 돌 위의 허공이어서나는 절에 기대지 않고 저 눈의 벽에 쓴다.잿빛 가사 너풀거리며 내려서는 하늘오래지 않아 이 길도 몇 마장 안쪽에서아예 지워지겠지만 이미 푸석거릴 부석사 뜬 돌거기도 부유의 끝자리는 있으리라.― 김명인, 〈부석사〉, 《따뜻한 적막》, 문학과지성사, 2006이 시에서 시인은 세계에 관한 유한한 인식을 통해 일종의 허무주의적 태도를 내비치고 있다. 그가 이러한 인식에 다다르게 된 계기는 직접적으로는 자신의 무미건조한 일상에 침투한 “외사촌 아우”의 죽음일 것이다. 바로 서두에서 고백하다시피, 그는 “외사촌 아우”와 보낸 “한 시절”이 언제까지나 “푸른 무량”과 같이 반짝이고, 또 “지천”에 널린 “청록”만큼이나 끝없을 줄 알았나 보다. 그러니 기존 현실과 지금 눈앞에 펼쳐진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낙차는 그의 삶의 지반을 뒤흔들만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이제 그의 눈앞에서 “외사촌 아우”의 죽음은 제아무리 “눈발이나 희끗거릴 바람의 마력”이라고 해도 “힘껏 던져도 부풀릴 수 없는 바위 꿈”과 같은 불가항력의 현실이 되었다.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외사촌 아우”의 죽음을 세계의 유한성에 관한 인식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가 “외사촌 아우”의 죽음을 “부석사 뜬 돌”의 “부유의 끝자리”와 연결하고 있는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부석사 뜬 돌”이 우리에게 부석사라는 불교적 세계를 창조해낸 연원이라고 한다면, 이것의 소멸은 결국 우리의 인식이 다다를 수 있는 세상 모든 것의 ‘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점에서 “외사촌 아우”의 죽음은 “부석사 뜬 돌”의 정지 혹은 소멸로 대표되는 세계의 유한성으로 확장되고 있는데, 시에서 양자의 축을 이어주는 매개를 우리는 바로 “눈”에서 찾을 수 있다. 폭설만큼 온 세상을 지워버리고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존재는 잘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을 에워싼 “눈발”만큼이나 도저한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나, 우리는 이를 순전히 세상을 향한 자포자기의 태도와 같은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는 그의 바깥에서 직면한 죽음의 시선으로써 바라본 삶의 유한성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허무주의는 기존의 삶으로부터 자신을 한 발짝씩 내딛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가 “외사촌 아우 빈소 자리”로 가는 길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 “눈발”이 아무리 “어떤 필생”과는 무관하게 나무를 헐벗게 만들지라도 그 나무의 가지들이 오로지 “떨림만으로/ 고스란히 눈꽃을 받들고” 있지 않느냐고. 그리고 “함박눈”이 그와 구원의 상징인 부석사 사이를 아무리 가로막는다고 해도 자신은 “절에 기대지 않고 저 눈의 벽에 쓴다”고 말이다.
그러니 그는 지금 “눈꽃”과 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삶을 적극적으로 껴안는 방식으로 구원의 장소를 마련하고 있다. 그는 결국 눈 속에 갇힌 것이지만 순간순간 변하는 세계를 다시 쓰려는 결단에 자신을 가둔 셈이다. 어쩌면 이것은 종교적 깨달음과 크게 먼 거리에 있는 인식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믿음의 영원성과 사랑의 승화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새벽이 지나도록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호승,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창작과비평사, 1997이 시에서 시인은 선묘 낭자의 입장에서 의상대사와 선묘의 숭고한 사랑 이야기를 노래하고 있다. 의상대사와 선묘의 사랑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부석사의 창건 설화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시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이 이야기의 요지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의상은 자신이 머물던 신도의 집에서 선묘를 만나게 되었고, 선묘는 첫눈에 반한 의상을 향해 끈질긴 구애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불법을 향한 의상의 신념을 받아들이고, 그의 제자로서 그의 불법 수행에 도움을 주는 존재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0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의상이 귀국하던 때, 그녀는 바다의 용이 되어 그의 배가 거친 풍랑을 헤치고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호위하였다. 그리고 의상이 귀국하여 화엄 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절터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공중에 뜬 돌이 되어 그 자리에서 훼방을 놓던 도적 떼를 굴복시켰다. 바로 거기에 세워진 절이 오늘날 부석사이다.물론 이 이야기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록된 부석사의 창건 설화에 등장하지 않거니와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서사 자체의 특성상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후대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민중들이 극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사실성의 여부를 떠나 우리의 삶 어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이에 대해 시에서는 종교의 진리가 파생하는 장소가 한 사람을 향한 곡진한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 그러한가. 진정한 사랑에 빠진 이에게는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을 만큼 절실하고,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을 만큼 간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가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라고 하거나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 사랑과 기다림의 명령이자 맹세이다. 실제로 그 명령과 맹세는 선언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그녀가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는 상황과 같이 바로 지척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행위로 나타나 있다.이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 한 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는 것과 같은 절망 속에서도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는 것과 같이 그의 마음에 맺힌 염원을 빌어주는 일 아니겠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부석사라는 종교를 지탱하고 있는 주춧돌이 결국 한결같은 사랑이었다는 진실을 알게 된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의상은 종교를 배우기 이전에 이미 자신도 모르게 선묘의 마음을 계기로 하여 종교를 깨우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후 그가 펼쳐 보인 위대한 사업은 그러한 깨달음의 맹아가 때를 만나 현실화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종교는 사랑에게 큰 빚을 지고 있기에 우리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