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가리키는 번지수이다. 우리는 크든 작든 예기치 않은 재난에 노출되어 있거니와 미시적인 차원에서 이 사회의 어둠이 드러나는 재난을 심심치 않게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고통이 잠재성을 가지게 될수록 우리의 눈앞에는 너무나도 많은 고통이 출현하게 되고, 또 다른 어느 때보다 참혹하고 비참한 고통이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고통의 빈도와 그 강도가 점차 커질수록 우리는 오히려 고통에 대해 무관심해지며 고통의 중핵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시간 동안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고통받는 이의 언어를 받아적었던 한 사람의 말은 우리에게 적잖은 울림으로 다가선다.여기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고통을 겪는 이는 고통의 주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고통에서는 고통이 주체다.―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나무연필, 2018 사실 그가 내린 “고통에서는 고통이 주체다.”라는 결론은 우리 각자의 고통에게 돌려줘야 할 몫인지도 모르겠다. 고통에 처한 사람은 자신의 고통이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것이라 말하기 마련이다. 그건 그의 시선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절대성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낄 법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외부로 돌릴 때 고통에 처한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고통이 전부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 각자의 고통을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불가능한 존재겠지만, 바로 이 사실 자체가 우리를 인간적인 존재로 서게 만드는 가능성의 지반이 된다. 이에 대해 고통학자 엄기호는 우리가 결코 고통을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을 언어화하고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적고 있다. 이런 관점에 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통의 추방이 아니라 고통의 포용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고통에게 본래의 입을 돌려주는 일이다.
이처럼 이 글에서 고통에 달린 입을 환기하고자 한 것은 어느새 10년의 세월이 흐른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이때 아래의 시들은 세월호 참사에 의한 304명의 희생자와 그들을 잊지 못해 싸우고 있는 유가족들이 여전히 고통의 소리를 내고 있음을 우리의 귀에 들려준다.
검은 냄비 속에 검은 홍합이 가득하다켜켜로 쌓인 홍합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홍합과 홍합의 틈바구니에소리가 묻혔다냄비에는 찬물이 들어 있고홍합은 바다에서 왔다한 번도 물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한 번도 물에 빠져본 적이 없어요옷을 입고가스 불에 올려졌다불꽃은 새파랗고추워저절로 부딪치던 이를 넣고 입이 닫혔다무서워파도를 입고 입고 입고단단해졌다갇혔다물이 들어오지 않게 붙지 않는 입을 꽉 다물고 있던 것가라앉지 않기 위해 끝까지 주먹을 풀지 않았던 것홍합이 덜그럭거리며 끓어올랐다딱딱 이를 부딪치듯이여기는 아직도 구겨진 벽거품이 넘친다 냄비 뚜껑이 열린다어린 손목이 알고 있는 시계는 어디에서 멈췄을까홍합이 벌어지고 있다선홍색 잇몸이 보인다― 이원, 〈검은 홍합〉, 《사랑은 탄생하라》, 문학과지성사, 2017 이 시에서는 분명 세월호 희생자들이 겪은 혹은 겪었을지 모를 고통의 소리로 가득 차 있다. 바로 시인은 “검은 홍합”을 매개로 하여 고통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고, 실제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검은 홍합”에 빗대고 있다. 왜냐하면, “검은 홍합”을 삶는 “냄비에는 찬물이 들어 있”었고 “홍합은 바다에서 왔”기 때문이리라. 이에 따라 우리는 시에서 차가운 바닷물에 빠진 홍합을 세월호 희생자들과 겹쳐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놓치지 않아야 할 점은 따로 있다. 그것은 시에서 고통의 입을 통해 고통의 소리가 발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에서는 검은 냄비에 가득 쌓인 홍합이 “입을 꼭 다물고 있”으며 “홍합과 홍합의 틈바구니에/ 소리가 묻”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한 번도 물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한 번도 물에 빠져본 적이 없”다고 하는 말은 희생자의 목소리라고 착각하기 쉽겠지만 사실은 고통의 목소리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보다 희생자들은 바닷물이 “추워” “저절로 부딪치던 이를 넣고 입”을 다물어야 하고 “무서워” “파도를 입고”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여 있다. 그들이 “물이 들어오지 않게 붙지 않는 입을 꽉 다물”고 “가라앉지 않기 위해 끝까지 주먹을 풀지 않”을수록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점점 바닷속에, 그리고 자기 속에 갇혀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는 고통과 마주하게 되는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우리가 시인을 경유하여 고통에게 입을 돌려준 이상 고통의 소리는 결코 끝나는 법이 없다. 이에 대해 시에서는 검은 냄비가 끓어올라 “거품이 넘치”고 “뚜껑이 열”리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이는 세월호 희생자들이 마주한 고통의 소리가 넘쳐흐르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의 귀에 “홍합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는 세월호 희생자들이 차가운 바닷속에서 “딱딱 이를 부딪치”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의 눈에 “홍합이 벌어지”는 모습은 그들이 알고 있던 시간이 멈춘 순간 그들의 입에 드러난 “선홍색 잇몸”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세월호 희생자들을 삼킨 고통에 우리의 귀와 눈을 내주는 일일 것이다.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고밤은 달을 거대한 숟가락으로 파먹는다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눈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바닥 모를 슬픔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눈을 감으면 물에 불은 나무토막 하나가 눈 속을 떠다닌다신이 그의 등에 걸터앉아 있기라도 하듯그의 허리는 펴지지 않는다못 박힐 손과 발을 몸안으로 말아넣고그는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간다밤은,달이 뿔이 될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신철규, 〈눈물의 중력〉, 《지구처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2017 이 시에서는 세월호 참사의 생존자와 세월호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겪은 혹은 겪었을지 모를 고통의 울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앞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덮친 고통의 소리의 직접적인 경청자였기에 어떤 면에서 고통의 곁이라 부를 법하다. 이들에 대해 앞서 엄기호는 우리에게 귀한 성찰을 제공한 바 있다. 그건 바로 ‘고통의 곁이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아니라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자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고통의 곁에 선 이가 단순히 현존하지 않고 고통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시에서 고통의 곁에 선 이의 황량한 내면 풍경을 엿보게 된다. 그는 세상의 한 사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전부를 잃었기에 밤이 “달을 거대한 숟가락으로 파먹”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처참하다. 그에게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을 만큼 기적의 가능성이 희박하고 “신이 그의 등에 걸터앉아 있기라도 하듯” 그 어떠한 구원의 가능성도 차단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엎드려서” 우는 일 이외에 뭐가 있을까. 하지만 그의 울음은 단순한 상실의 충격이나 절망의 몸부림을 넘어선 지점에 가닿고 있다. 바로 그의 눈물에는 그가 상실한 대상과 함께 한 이 세상의 갖가지 순간들이 녹아 있거니와 그가 결국 눈물의 중력을 상기하는 것은 그들을 끝까지 이 세상의 존재로 서게 하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그러니 그는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고통의 곁에 선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의 울음과 눈물이 이 세상의 진실에 속할 수 있도록 경청하고 동참하는 일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고통에게 본래의 입을 돌려주면서 문득 깨닫는 바가 있다. 그건 고통에게는 애초 귀가 없고 커다란 입만 있어서 우리가 귀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런 우리를 아직 침몰하지 않은 고통의 소리가 에워싸고 있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