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자신만의 폐허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인간의 폐허야말로 그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본다. 아무도 자신의 폐허에 타자가 다녀가길 원치 않는다. 이따금 예외가 있으니 사랑하는 자만이 상대방의 폐허를 들여다볼 뿐이다. 그 폐허를 엿본 대가는 얼마나 큰가. 무턱대고 함께 있어야 하거나, 보호자가 되어야 하거나, 때로는 치유해줘야 하거나 함께 죽어야 한다. 나의 폐허를 본 타자가 달아나면 그 자리에 깊은 상처가 남는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느 한순간에 하나가 되었던 그 일치감의 대가로 상처가 남는 것이다. - 소설가 신경숙신경숙이 말한 폐허를 가장 섬세하게 묘사한 소설가는 아마도 조르주 바타유일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읽어본 작가 중에서는….바타유의 소설의 주요 키워드는 `전복`과 `탈주`이다.바타유 소설에서 `전복`과 `탈주`는 인간 내면의 폐허를 금기가 아닌 유대감으로 전환시킨다. 그것은 위반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가능하다. 바타유의 소설은 난삽하며 더욱이 퇴폐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당시 모든 금기의 갇힌 사유자들에게 비난을 받곤했다. 금기에 갇힌 내게 눈 이야기는 큰 충격이었다.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 나는 68세대의 사유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었고, 우연히 목격한 바타유의 도발적인 사유는 금기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당시 금기를 위반하는 놀라운 경험은 무서운 속죄감과 동시에 황홀경을 선사했다. 물론 놀라운 황홀경이라 하기에 미적지근한 면이 없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의 놀라운 에로티시즘에 대한 성찰은 나의 위반 행위들을 추인했으며, 나의 사유를 보다 자유롭게 해주었다. 오래전 기억이다. 친구의 책장에서 마광수 교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책을 우연히 펼쳐 들었던 적이 있다. (과연 우연이었을까?) 그때 내게 무의식적인 마 교수에 대한 적대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강렬한 금기는 또한 강렬한 욕구의 다름아니다.` 는 바타유의 명제는 아마도 내가 그 책에 몰입하게 되었던 이유였던 것 같다. 물론 그 책은 제목만큼이나 강렬하지도, 혹은 금기를 위반하고 있지도 않았다.   바타유에게 있어 주요한 명제는 위반이었다. 위반은 금기를 전제로 한다. 바타유에 따르면 금기는 인간의 고유성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스스로 금기를 가진다. 바타유는 이러한 금기가 생긴 이유를 노동의 시작에서 발견한다. 인간이 노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목적의식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목적의식은 인간에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준별하게 하고, 이로 말미암아 경계를 짓게 되면서, 금기를 낳게 되었다고 한다. 그중 가장 우선적인 것이 근친상간의 금기였다. 성에 대한 금기는 인간의 사적 소유의 시작과 동류한다. 그것은 가족의 탄생과도 밀접하며, 이는 노동의 시작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바타유는 보고 있다. 다음으로 바타유는 인간이 죽음 의식을 발견함으로써 성에 대한 금기를 강화했다고 보고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의 상징과의 신체적 거리두기와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창조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동시에 생명과 관계된 행위의 신성화로 나타났다. 이때부터 성행위에 대한 사회적 `신화`는 성행위에 대한 `금기`의 형식으로 사회 질서 속에 자리매김했다고 보고 있다. 바타유에게 있어 이러한 금기는 역설적이게도 위반이라는 형식으로 또한 판타지를 구성했다고 보고 있다. 에로티시즘의 기원은 바로 이러한 금기 위에 있다. 위반이 주는 쾌감, 그 짜릿한 실존의 직감은 신화화된 금기를 넘어선 인간의 자기보존을 위한 가장 극적인 탈주라는 것이 바타유의 생각이다. 에로티시즘을 연구한 많은 인간이 죽음과 에로티시즘을 직결시켰던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죽음은 가장 극단적인 금기이며, 죽음의 금기를 넘어서는 가장 극적인 위반이 가장 실존적이라고 믿었던 많은 사유자가 만든 그로테스크의 미학은 바로 이러한 짜릿함의 쾌감 속에서 표현되었던 것이다. 바타유에게 있어 기독교는 악의 기원이었다. 금기의 영역에 악의 개념을 접목함으로써, 인간을 훈육하고자 했던 역사가 기독교의 역사이며, 이러한 역사가 서양의 사유를 경도시킨 주범이라고 보고 있다. 에로티시즘이 느슨한 금기에서 악으로 변전한 것 또한 기독교의 전략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전복적 사유는 68세대의 사상가들에게 전이된다. 바타유의 에로티시즘은 금기에 대한 위반이었다. 그가 서 있던 지평은 계몽주의의 폭력이 현실화 되었던 전간기였으며, 인간들에게 남은 유일한 자산은 폐허에서 살아남기 위한 모든 `부정`이었다. 또한 과거에 대한 `전복`과 과거로부터의 연속성을 `탈주`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가장 주목받았던 것은 사르트르로 대변되는 실존주의였으며, 인간의 실존적 자각이 이성이 연출한 폐허를 넘어서는 유일한 길처럼 여겨졌다. 바타유는, 타락과 폐허의 잔해처럼 보였으며, 말폐적 병폐처럼 보였다. 모든 금기를 넘어서려는 그의 전복적 사유는,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 한 채 사그라질 위기에 있었다. 여전히 이 시기 에로티시즘은 금기의 영역이었고, 혹은 변종이었다. 비로소 68세대의 등장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대한 물결이 그의 전복적 사유를 조망하기 시작했고, 그의 위반이 퇴폐가 아닌 창조의 활력임을 밝혀냈다. 바타유의 사유는 어쩌면 시대를 앞서간 불운한 사유자를 만들어 냈는지도 모를 노릇이다. 금기 속에서 금기를 위반하는 자는 언제나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그 깊은 질곡 속에서 언제나 이단자나 반역자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비록 역사가 그를 구원해 주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사리 금기를 넘어서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위반 행위는 이성에 의한 지향성이 아닌 견딜 수 없는 내적 체험의 표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삶이 더욱 실존적인 것이다. 에곤쉴레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조르주 바타유의 소설을 읽을 때, 또한 사드 백작의 소설을 읽을 때, 나는 몹시도 놀라운 죄악감을 느꼈다. 보를레르와 랭보에게서 느꼈던 형언 할 수 없는 불쾌감의 단서 또한 아마도 지금처럼 선명해진 죄악감의 단서일 것이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은 놀라운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이성의 힘으로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오직 견딜 수 없는 내적 체험의 추동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나에겐 많은 금기가 내재해있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곳까지 말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씩 위반하고 있다. 그것은 나를 더욱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나는 `전복`과 `탈주`의 사유적 궤적을 따라 나를 해방시킬 것이다. 그것은 나의 삶의 유일한 지향이다. 내가 불쾌하기 짝이 없던 에곤쉴레의 그림을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변화이다. 그리고 조르주 바타유의 글을 흥미롭게 읽고 있는 것 또한 그러한 증거의 한 축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위반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위반에 사로잡힌 체 창조의 의지를 상실한다면, 나는 사르트르가 바타유를 바라봤던 염려처럼, 타락하고 퇴색해버린 별종이 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글쓴이|이재호현직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 중 철학, 미학, 역사, 교육학 등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공부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를 즐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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