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은 의견 문제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다른 의견, 다른 세계관을 갖는다고 해서 거품을 물고 미쳐 날뛰는 일이 왜 필요한가. 어째서 끊임없이 경찰을 부르고, 살인에 이르도록 미워한단 말인가. ……혼자만이 옳다는 오만에서 잔인함과 박해가 나온다. ……오직 높으신 분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때로는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런 탄압과 박해가 일어난다.카스텔리오는 단 한 가지만이 이러한 야만성에서 인류를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관용이었다. 우리의 세계는 단 한 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진리들을 위한 공간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원하기만 하면 서로 나란히 모여 살 수 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신념을 판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카스텔리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중다른 의견을 가질 수 없도록 했던 권력을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보곤 한다. 하나는 개혁의 대상이자 절대 권력화를 설계하고 지향했던 오소독소한 독재체제에서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독재체제에 저항하거나 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신질서를 설립하려 했던 자들에게서 이다.카스텔리오는 전자가 아닌 후자에게 더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다. 그것은 인류에게 진보가 중요하며, 그 진보를 답보케 하는 것이 후자가 지닌 오류에서 더 크게 기인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카스텔리오에게 있어 그가 직면했던 현실적 대상은 구교의 질서를 타파하고 신교의 질서를 확립한 칼뱅의 공화국에서 자행된 억압과 폭력, 즉 다른 의견을 압살하는 공적권력과 공동체의 광기에 가까운 집단성이었다.시대의 오류를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했다는 자신감과 다시 불어오는 반동의 바람에 대한 지나친 불안감, 그리고 권력의 속성에 취해 발하는 자유와 관용을 희생시키고야 마는 조바심에서 촉발한 대중독재와 그들의 상징들.스테판 츠바이크가 카스텔리오의 칼뱅에 대한 다른 의견을 새 시대에 부활시킨 이유는 이러한 독재의 일반성 때문이다. 특히 새시대를 열어가는 진보의 주체들에게 있어 그의 견해가 매우 중요한 충고여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그리고 진보의 주체들이 실패했을 때 불어 닥치는 더 가혹한 억압의 시대, 짧지만 치명적인 역사 속에 간간히 반복되는 반동이라는 단막극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기도 했다.공적권력의 칼날 위에서 다른 의견을 듣지 않는, 나아가 다른 의견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시대, 그리고 권력자가 된 시대의 상징들.관용이 사라진 사회는 미래가 있을까? 다른 의견을 가진다는 것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자기검열을 강제받게 되는 시대, 좋은 시대인가?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나?다시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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