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밭등’을 넘는다는 것은 죽장면 하옥리 구역을 벗어나 상옥리 구역으로 들어선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드디어 상옥리 구간으로 들어서겠습니다. 안수밭등 이후엔 곧 703m봉에 닿고 10여분 계속 내려서면 󰡐통점재󰡑(530m)에 이릅니다. 이 구간을 역주행할 경우 통점재에서 703m봉까지는 무려 170m를 쳐 올라야 합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20여분 땀 흘려야 할 높이입니다. 저 703m봉을 먹방골 어르신은 ‘바가지등’이라 불렀습니다. 옛날 대홍수 때, 그 봉우리가 엎어놓은 바가지만큼만 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수밭등과 바가지등 사이의 1km가 먹방골 마을의 뒷산마루입니다. 바가지등에서 내려서서 도달하는 통점재는 상옥리와 그 너머 중기리(청송 부남면)를 잇는 자동차 고갯길입니다. 고개를 넘어 계속 가면 청송읍으로 이어집니다. 통점재라는 이름은 그 재 북서편 너머에 통점마을이 있어 붙은 것이라 합니다. ‘통점’은 옛날 생활 도구이던 나무통을 만들어 생계 삼는 수공업 마을을 뜻합니다. 한자로는 ‘桶店’이라 표기됩니다. 그런 마을들은 대체로 외진 산골에 자리했고, 더러는 변음돼 󰡐퉁지미󰡑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통점재 혹은 통점현 통점령이라 불리는 재는 전국에 흔합니다. 비슬산 가는 비슬기맥 청도 각북면 지슬리 구간에도 통점재가 있습니다. 현지 주민들이 󰡐청산재󰡑(704m)라 부르는 게 그것입니다. 지슬리 북편 골 안에 옛날 통점이란 마을이 있었다고 어른들은 기억했습니다. 최초 출발점 710m봉에서 이곳 통점재까지의 산두렁 길이는 5.5km 가량으로 관측됐습니다. 통점재에서 이번 답사 종착점인 생법재 직전의 709m봉까지 남은 거리는 8km쯤 됩니다. 앞으로 걸을 구간도 물론 줄곧 상옥리의 서편 외곽에 해당하는 낙동정맥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걷는 동안에는 상옥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그곳서 생산되는 멍멍이 확성기 라디오 등의 소리가 옆집 소리처럼 들립니다. 산줄기는 아예 마을의 생활공간 중 일부로 편입돼 온 듯 마을로 전파를 끌어다 쓰던 가정용 TV 안테나 유해가 3개나 그 위에 널브러져 있기도 합디다. 이건 상옥 마을이 낙동정맥 위로 그만큼 높게 올라와 자리 잡았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반면 정맥 너머 있는 죽장의 가사리 생법리, 청송 부남의 중기리 등은 산줄기에서 멀리 내려가 자리 잡았습니다. 결국 이 구간 낙동정맥은 ‘상옥의 산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는 셈입니다. 통점재를 출발해 10분 정도면 100여m 높은 629m봉에 오릅니다. 상옥리 북쪽 끝 구역 먹방마을 위에 해당합니다. 거기서 30분 뒤면 777m봉 아래 곡각점에 이릅니다. 해발 750m로 관측되는 지점입니다. 산길은 777m봉을 오르지 않고 저 굽는 점에서 거의 90도 좌선회해 745m봉으로 연결해 갑니다. 750m 곡각점과 745m봉 중간에 잘록이가 둘 있습니다. 그 둘 모두에는 오래 된 옛길이 있습니다. 청송군 부남면의 중기리 등 인근 마을들과 포항시 죽장면 상옥리를 잇는 고개입니다. 자동차시대가 오기 전 저 부남면 마을들의 생활권은 포항에 속해 있었다고 합니다. 시장도 그리로 가고 학교도 그리로 다녔다는 뜻입니다. 중기리 쪽 옛 어른들은 그 재를 넘고 상옥을 거쳐 청하까지 장보러 다녔다고 했습니다. 같은 부남면의 이현리 어른들이 간장재를 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겠습니다. 반면 상옥리 옛 어른들도 저 재를 넘어 청송 부남면 중기리의 반재골마을이나 옻밭골마을 쪽으로 땔나무를 하러 다녔다고 했습니다. 상옥에도 산이 많지만 인구 밀도 또한 높아 땔나무를 구하려면 청송까지 넘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쪽은 인구가 적은데도 산은 더 많아 땔감에 여유가 있었다는 겁니다. 저렇게 중요한 통로이다 보니 1960년대까지만 해도 그 잿길은 하도 발길에 닳아 반질반질했다고 어른들은 기억했습니다. 또 재 양편 마을들에서는 이 재에 이르는 길을 각각 나눠 맡아 주기적으로 손질하고 관리해서 항상 이용 가능케 유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고갯마루였음조차 기억해 주는 사람이 드뭅니다. 낙동정맥이나 낙중(팔공)기맥 종주자들이 지나다니긴 하지만, 그들은 재에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불과 4, 50년 전 일조차 지금으로서는 상상 못할 과거로 묻히고 만 셈입니다. 두 재 중 북쪽 것은 ‘아랫재’(654m), 남쪽 것은 ‘윗재’(635m)라 했습니다. 777m봉서 윗재까지는 20여 분 걸립니다. 저 윗재서는 금방 745m봉에 오릅니다. 745m봉은 일단 ‘고래산’이라 지칭토록 하겠습니다. 고래(상옥리)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저 이름에 대해서는 낙중(팔공)기맥 답사 때 보다 세밀하게 살피겠습니다. ‘고래산’은 󰡐낙중(팔공)기맥󰡑이라는 장대한 산줄기가 낙동정맥으로부터 갈라져 가는 분기점입니다. 낙중(팔공)기맥은 팔공산(1,193m)까지의 길이만도 200여 리나 되는 긴 산줄기입니다. 주변으로 중요한 지릉들을 배출해 청송․영천․의성․경산․군위․대구․칠곡 등의 지형을 결정키도 합니다. 지형도로 정밀히 보는 낙동정맥 상의 낙중(팔공)기맥 분기점은 윗재서 7, 8분 올라 도달하는 해발740m 지점입니다. 고래산 745m봉 정점과 거의 평평하게 연결된 긴 정상부 북편 첫머리가 거기입니다. 지형도는 그곳에 표고점을 설정해 해발 740m라 표시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낙중(팔공)기맥 외에 745m봉 서릉도 갈라져 나갑니다. 청송 중기리의 반재골마을과 옻밭골마을을 가르는 산줄기입니다. 고래(상옥)서 반재골마을로 가자면 재만 바로 넘어서면 되지만, 옻밭골마을로 가려면 반재골재로 오른 뒤 저 서릉을 타고 가다가 ‘상옥재’(675m)나 ‘삼밭골재’(588m)를 통해 마을로 내려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낙중(팔공)기맥 등산로는 저것보다 조금 아래에서 분기합니다. 시간거리로 짐작할 때 저 산길 분기점 높이는 해발 725m쯤 될 듯합니다. 그런데도 현지엔 누군가가 그 높이를 733.9m라고 표기해 놨습니다. 어떻게 몇 십cm 단위까지 정밀하게 측정해 내 놓은 결과일까 궁금합니다. GPS라는 기계에 의존한 것일까요? 휴대용 저 기계가 표시하는 높이를 그대로 믿어 널리 알려 좋기는 한 것일까요? 생각이 너무 단순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낙동정맥은 고래산에서 낙중(팔공)기맥을 독립시켜 보낸 후, 자신은 그 분기점서 직각 좌선회합니다. 그러면서 먼 거리에 걸쳐 깊게 낮아집니다. 553m잘록이로 190여m나 떨어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는 해발 550m전후의 고도를 유지합니다. 낙동정맥이 그렇게 해서 도달하는 중요한 잘록이는 󰡐가사재󰡑(510m)입니다. 동쪽의 상옥리와 서쪽의 가사리를 잇는 죽장면내 재입니다. 앞서 금호강이 죽장에서 발원한다고 했지만, 그 시원지 중 하나가 바로 이 가사재 지점입니다. 물길은 여기서 ‘가사천’이란 이름 아래 남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해 죽장면 소재지 즈음에서 ‘자호천’에 합류한 후 영천호로 흘러 들어갑니다. ‘가사재’란 이름은 그 서편에 죽장면 가사리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입니다. 그 동편의 죽장면 상옥리서 가사리로 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도달할 지점의 이름을 갖다 붙였을 것입니다. 반면 가사리 사람들은 이 재를 ‘고래재’라 합니다. 그 마을서 이 재를 넘으면 동편의 고래 마을에 도달하기 때문입니다. 재의 이름들은 이렇게 그 도달할 지점을 기준으로 붙여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낙동정맥은 그 동안 청송-포항의 시․군 경계 역할을 하며 주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낙중(팔공)기맥 분기점인 고래산(745m) 이후 가사재를 거치면서는, 상옥리 권역 끝점인 709m봉에 이르기까지 4km 넘게 역할 위상이 확 떨어집니다. 읍․면조차 갈라붙이지 못하고 겨우 죽장면내 마을간 경계선으로나 기능하는 것입니다. 산줄기 높이도 대체로 600± 40m로 유지됩니다. 상옥리 구간의 종점인 709m봉은 제대로 된 이름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거기에는 ‘문천바위’라는 지물이 있어서 그 아래 생법리서는 저 바위로써 봉우리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문천바위’는 특히 포항서 반복해 나타나는 암괴입니다. 여기에 있고, 앞으로 보게 될 죽장면 석계리 달니바위마을 입구에도 있습니다. 또 죽장면 일광리 소위 ‘수석봉’에도 있습니다. 저 이름 속의 ‘문천’은 ‘문지방’의 다른 말로 밝혀졌습니다. 문지방 격의 바위, 혹은 문틀 같은 바위가 ‘문천바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천바위봉’은 줄여 ‘문바위봉’ 혹은 한역해 ‘문암봉’ 정도로 표기하면 될 듯합니다. 문암봉 문암산은 전국에서 널리 나타나는 지명입니다. 709m봉의 높이는 국가기본도에 712m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형도는 거기 설치된 측량용 삼각점 높이를 709m로 표시하고 있고, 현장의 삼각점 안내판은 “약 710m”라 제시하고 있습니다. 둘의 높이에 3m 차가 난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현장을 확인하면 삼각점 지점보다 더 높은 지형은 없습니다. 정점에 헬기장이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봐, 본래는 더 높은 흙봉우리가 있었는데 깎아 냈는지 모를 일입니다. 인공시설이 있는 산봉들에서는 가끔 이런 혼란 상황을 겪을 때가 있습디다. 그렇다면 이 봉우리 높이도 709m라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이 책에서는 그렇게 표시하겠습니다. 저런 혼란 때문인지 현장에 내걸린 산꾼들의 높이 표시가 여러 가지로 엇갈립니다. 709m라 한 곳이 있는 반면, 100m나 높여 811m라고 다른 봉우리와 혼동해 안내한 경우까지 뒤죽박죽이었습니다. 811m봉은 그 동편에 인접해 솟은 봉우리이지요. 지명과 관련해서도 혼란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엇보다 당혹스런 것은 ‘성법령’이란 표기입니다. 하지만 709m봉은 봉우리이지 ‘령’이 아닙니다. ‘령’은 흔히 재에 붙는 이름이니 저런 식의 표현은 근본부터 틀린 셈입니다. 비슷한 이름의 재는 거기서 내려서야 닿습니다. 게다가, 그 아래 재도 ‘성법령’이 아니라 ‘생법재’라 하는 게 더 적확하겠습니다. 뒤에 좀 더 살피기로 하고, 일단은 이렇게 바로 잡아 두고 지나치도록 하겠습니다. 생법재는 포항시 기북면 생법리를 죽장면 상옥리와 잇는 길목입니다. 높이가 해발 630m나 됩니다. 저 생법재는 지금까지 살펴온 낙동정맥에 생겨 있는 게 아닙니다. 정맥에서 빠져나가 동쪽으로 내려서는 가지산줄기 출발점에 있습니다. 다른 산줄기가 그 재를 통해 낙동정맥서 분기해 나간다는 얘기입니다. 그럴 때 낙동정맥 본맥은 709m봉을 거치고도 남서향으로 빗금 방식의 하행 행보를 이어 갑니다. 거기서 가지를 하나 떨어뜨려 두고는 부산 다대포 몰운대를 향해 자신의 행보를 계속해 가는 것입니다. 저 모습을 조금 구체적으로 서술해 보자면, 낙동정맥의 709m봉에서는 산줄기가 하나 동쪽으로 생겨나면서 생법재를 지나 독립해 나갑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로 퍼져 포항 주요 지역의 땅 모습을 결정짓습니다. 이것이 앞서 살폈던 바로 그 ‘포항기맥’입니다. 이제 정리할 시간입니다. 포항 깃대봉인 710m봉에서 포항기맥 분기점인 709m봉까지의 낙동정맥 산두렁 길이는 도합 13.5km 정도입니다. 그 중 9km는 상옥마을, 4.5km는 하옥마을 서쪽 외곽의 역할을 합니다. 하옥은 그것과 하옥북릉 5.5km를 합한 10km를 북서편 담장으로 삼습니다. 결국 상옥 하옥 두 마을 서편 외곽 길이가 엇비슷해지는 셈입니다. 이 구간에서 가장 높은 지형은 ‘평수밭등’이라 했던 803m봉, 가장 낮은 지형은 510m재(가사재)였습니다. 대체로 큰 오르내림 없이 아기자기한 흐름을 보인 편입니다. 상옥마을의 높은 곳 해발 고도가 380~400m쯤 되니, 겨우 2, 300m 더 높은 담장이 그 외곽을 둘러친 양상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해서 산줄기가 드디어 도달한 곳은 포항시 죽장면 ‘상옥리’입니다. 해발 350m 이상의 높은 고원에 매우 넓게 펼쳐진 마을입니다. 이 마을의 본명은 ‘고래’라 했습니다. ‘고’에 힘을 넣고 높게 발음한 뒤 ‘래’는 약하고 낮게 소리 내는 고래입니다. 바다에 사는 고래와는 발음 방식이 다릅니다. 포유동물 고래를 발음할 때는 경상도식 악센트가 ‘래’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마을이 저 동물을 닮아서 같은 이름이 붙은 게 아니라, 둘이 다른 어원을 가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저렇게 ‘고래’라 하던 마을 이름이 ‘상옥’으로 고착된 것은 100년 전 일본제국에 의한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였다고 합니다. 거길 흐르는 ‘옥계’ 물길을 토막 내서 위에 있으면 상옥, 아래 있으면 하옥 하는 식으로 구분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행정명칭은 상옥으로 변했으나, 본색은 고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저 상옥리 고원은 ‘고래고원’이라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옛 어른들이 고래라 불러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