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710m봉을 조금 세밀히 살펴둘 차례인가 합니다. 드디어 포항 땅이 시작되는 시점(始點)이기 때문입니다. 청송-포항 경계가 되는 󰡐하옥 북릉󰡑이 저기서 출발한다고 주목한 뜻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저러고 보면 710m봉은 포항 땅의 깃대봉인 셈입니다. “여기부터는 포항 땅이네!”하고 선언하는 깃발을 내 단 듯 하는 것이 710m봉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710m봉은, 정말 깃대처럼 높게 솟아 어디서 봐도 쉽게 분간될 정도가 된다면 더욱 제격이겠습니다. 또 도면으로 볼 때는 정말 그러할 듯이 생각되기도 합니다. 고도(高度)가 우선 일대 봉우리 중 높게 나타납니다. 거기서 동쪽으로는 ‘하옥북릉’이라는 뚜렷한 산줄기가 분기하기도 합니다. 저 정도 변별력을 갖췄으면 자연스레 시각적으로 두드러질 듯합니다. 그래서 낙동정맥을 걸을 때 710m봉은 두드러지는 지표가 돼 주리라 기대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현장은 딴판이었습니다. 첫째, 710m봉은 높이나 모양에서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이게 710m봉인지 저게 그것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정상부도 그냥 널찍할 뿐 특징이 없었습니다. 둘째, 거기서 나뉘어 가는 하옥북릉 또한 식별되지 않습니다. 만약 저 지릉이 710m봉 정점에서 표 나게 갈라져 갔더라면 달랐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 지릉은 정점과는 상당히 떨어진 기슭에서, 갈라져 가는 줄 짐작조차 하기 불가능케 분기해 가 버립니다. 더욱이 분기점의 산길마저 T가 아니라 Y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결국 남쪽으로 걸을 때는 하옥북릉 분기점을 구분 못한 채 그냥 지나치고, 북쪽으로 걸을 때는 하옥북릉 가는 길을 질등재 가는 낙동정맥 본맥 길인 줄 여겨 잘못 걷기 십상입니다. 상황이 저런 줄 모르고 하옥북릉을 찾겠다고 덤볐다가 애를 먹었습니다. 방향조차 판단이 안 돼 오도 가도 못하는 지경에 빠지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한 산줄기를 걸어 보다가 실패하면 되돌아오고, 그 다음 산줄기에서 또 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그러길 여러 번 되풀이했습니다. 나중엔 꼭 도깨비에 홀린 듯해서 나침반조차 의심할 상태에 이르렀었습니다. 물론 저렇다 하더라도 낙동정맥을 이어 걷는 일에는 큰 장애가 없습니다. 문제는 포항 땅의 첫 봉우리인 710m봉을 깔끔하게 식별해 내지 못하는 것, 그리고 하옥북릉 출발점을 찾아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앞의 것은 710m봉에 특징이 없어서입니다. 뒤의 것은 주로 하옥북릉 분기점 일대가 지나치게 펀펀해서입니다. 나중에 듣고 보니, 펀펀한 지형은 마을 어른들이 더 앞서 오래 전부터 특별히 주목해 왔을 정도로 두드러진 저 일대의 특징이었습니다. 저렇게 높은 땅에 형성된 평평한 땅을 산사람들은 대체로 ‘버덩’이나 ‘평전’(平田)이라 부릅니다. 저게 변해 ‘펀전’이 되거나, ‘퍽정’으로까지 나간 경우도 있다 했었지요. 그런 중에 이곳 평탄면에 대해서는 현지 어른들이 ‘평수밭’이라는 특별한 명칭을 붙여두고 있었습니다. 평탄면은 710m봉 일대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약 2.5km 떨어진 803m봉에 이를 때까지 곳곳에 나타났습니다. 어른들은 저 모두를 ‘평수밭’이라 했습니다. 그리고는 곳에 따라 ‘큰평수밭’ ‘작은 평수밭’ ‘안평수밭’ ‘바깥평수밭’ 등으로 나누기까지 했습니다. ‘평수밭’이 어디서 유래한 이름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다른 곳에서 들을 수 있는 ‘수밭’ ‘안수밭’ 같은 이름들이 연상됐습니다. ‘수밭’은 청룡산 밑 대구 도원동의 한 자연마을이고 ‘안수밭’은 포항 상옥리 먹방마을 뒤 지형 이름입니다. 사전을 보니 ‘밭’은 ‘뭔가가 가득 들어찬 땅’이라고 합니다. 그럼 어떤 것이 ‘수밭’이기에 ‘안수밭’ ‘평수밭’ 이 나타난 것일까요? 저 평수밭은 한때 밭으로 개간됐었다고 합니다. 일대에서 화전이 일궈졌다는 얘기였습니다. 높은 지대였지만 자연스레 민가가 들어서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산림보호 정책이 강화되면서 화전은 자취를 감춰갔습니다. 그러자 평수밭은 억새밭으로 변했습니다. 억새는 산마을들에서 지붕을 일 때 꼭 필요한 재료입니다. 들마을에서는 볏짚으로 이엉을 엮지만 산골에선 억새로 그랬습니다. 인접 포항 하옥리 도등기마을 어른은 저 평수밭으로 이엉 엮을 억새 베러 다니던 어릴 적 일을 오랜 추억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710m봉은 식자층에 의해 ‘도등산’(挑燈山)이라 불렸던 것 같은 느낌이 옵니다. 40년 전 씌어진 ‘일월향지’에 그런 흔적이 보입니다. ‘도등산’(挑燈山․750m)에서 산줄기가 갈라져 간다”는 취지로 설명한 게 그것입니다. 710m봉이 아니고는 그에 근접하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누구도 그걸 도등산이라 하지 않았으며, 일월향지 자체 기술에도 혼선이 보입니다. 710m봉서 갈라져 가는 하옥북릉은 청송 얼음골의 남릉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얼음골 일대의 그 화려한 벼랑바위들이 바로 이 산줄기 기슭에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그 몸체인 하옥북릉 자체는 더 화려할 수도 있겠다 기대하기 십상이겠습니다. 그러나 하옥북릉 마루 길은 허망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기암괴석으로 휘황찬란한 그 북사면 얼음골 계곡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등성이 길은 오직 흙길이었습니다. 준수한 촛대바위는커녕 전망대 삼을 덤바위조차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하옥북릉은 그렇게 길지도 않습니다. 진입 후 곧 󰡐해월봉󰡑 입간판이 나타납니다. 간판이 선 자리는 해월봉 정점에서 20여m 내려선 곳입니다. 봉우리 높이를 국가기본도는 607m라 하는데 안내판은 610m라 알리고 있었습니다. 해월봉이 주목받는 것은, 그것이 청송 얼음골 앞산이기 때문입니다. 해월봉서 북으로 내려서는 지릉의 끝에 얼음골 벼랑바위들이 포진해 있는 것입니다. 얼음골 안내판에 열심히 안내돼 있는 하옥북릉 순환 등산로 상승 통로는 바로 해월봉 북릉입니다. 해월봉에서 10분이면 󰡐구리봉󰡑(596m)에 닿습니다. 정점에 묘가 있어 지표가 돼 줍니다. 이 봉우리 자락에 하옥리의 중심마을인 ‘배지미’가 자리 잡았습니다. ‘하옥국민학교’였다가 지금은 학생야영장이 된 일대의 문화 중심도 거기 있습니다. 구리봉에서 다시 20분 채 못 걸어 󰡐달기봉󰡑(511m)에 닿습니다. 측량용 삼각점 표석이 뚜렷해 쉽게 분간됩니다. 하옥리 󰡐도등기󰡑(挑燈基) 마을 뒷산이기도 합니다. 짐작하건대, 앞서 본 ‘일월향지’는 이 달기봉 또한 ‘도등산’(挑燈山) 혹은 ‘도등대산’(挑燈臺山)으로 호칭했습니다. 개별 산덩이들을 안내하면서 도등산은 “죽장면 양령리 서쪽 5리 지점에 있다. 해발 515m 준령이다”고 한 것입니다. 일대에 달기봉 말고는 그에 상당하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저술이 산줄기 흐름을 설명할 때는 710m봉을 도등산이라 지칭하기도 했으니 저 혼란을 어쩌겠습니까. 결국 쓸모없게 된 저 명칭 중의 ‘도등’은 ‘심지를 돋워 호롱불을 더 밝게 한다’는 뜻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해월봉 구리봉 달기봉 등의 이름은 도등기마을 어른이 증언해 준 것입니다. 달기봉에서 얼마 안 내려서면 높이가 380m로 비정되는 󰡐강상골재󰡑가 나타납니다. 포항 하옥마을과 청송 항리를 잇는 고개입니다. 도등기 마을은 그 재 바로 아래 지점의 ‘도딤이골’에 있습니다. ‘도등기’와 ‘도딤이’, 어딘가 닮은 듯합니다. 같은 이름이 변한 것일까요? 강상골재를 거친 후 하옥북릉 산줄기는 곧 541m봉으로 치솟습니다. 옥계 물가의 하옥리 ‘새터’마을은 저 봉우리 아래 자리 잡은 것입니다. 새터 어르신은 저 봉우리를 ‘갈모봉’이라 했습니다. 뾰족하니 갈모를 닮은 봉우리라는 뜻일 것입니다. 갓이 비에 젖지 않도록 그 위에 덮어 쓰는 뾰족한 우비가 갈모입니다. 갈모봉은 포항․영덕․청송 세 시․군의 접경점입니다. 봉우리만 하나 달랑 솟았으면 두 시․군의 경계점밖에 안 되겠지만, 저 봉우리서 동릉이 하나 갈라져 나감으로써 3개 시․군 땅으로 나뉠 소지가 생겼습니다. 하옥북릉의 북편은 청송군, 하옥북릉-동릉 연결선의 남쪽은 포항시, 하옥북릉과 그 동릉이 ⦟ 모양으로 연결된 가운데는 영덕군 땅이 됩니다. 저 갈모봉을 생각할 때마다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덕현 조에 나타나는 ‘달로산’이 혹시 저것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현재 달로산은 팔각산 북쪽 혹은 서쪽 지점에 있는 것으로 판단돼 있다고 합니다. 주왕산 별바위 지점서 갈라져 내리는 산줄기에 ‘달로산성’이라는 유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덕군 달산면 봉산리 산성마을 일대가 그곳인가 싶습니다. 그쪽에서 대서천으로 흘러내리는, 팔각산 북편의 ‘산성골’은 매우 길고 아름다운 계곡으로 소문 나 있습니다. 달산면이라는 면 이름도 달로산과 닮아 보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 이쪽에서 달로산을 떠올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옛 지리지들이 영덕 오십천의 두 발원지 중 하나로 달로산을 꼽은 게 첫째입니다. 저때 주목한 물길은 산성골이 아니라 포항 상하옥 계곡을 발원지로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대동여지도에 달로산이 팔각산의 남쪽 지점에 그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지금 달로산이라 한다는 것은 그 반대편입니다. 갈모봉 이후 산줄기는 451m봉 349m봉으로 낮아지다가 222m봉을 끝으로 주행을 마칩니다. 349m봉은 영덕 쪽에서 청송 얼음골을 향해 오를 경우 ‘침수정’(枕漱亭)이라는 정자 즈음에서 전면으로 둥그렇게 솟아 보이는 그것입니다. 저걸 현지에선 ‘향로봉’이라 불렀습니다. 둥그런 모양새가 향로를 연상시킨 듯합니다. 마지막 222m봉은 ‘학소대’(鶴巢臺)라 했습니다. 학소대는 유별나게 북쪽으로 뾰족하게 튀어나가 있습니다. 그에 맞장구 쳐 물길 건너 북편에 솟은 팔각산도 뾰족한 끝점을 남쪽으로 내 밉니다. 앞의 것이 서편, 뒤의 것이 동편으로 튀어나옴으로써 짐승의 톱니형 이빨처럼 서로 꼭 끼이게 맞물렸습니다. ‘침수정’은 저 두 ‘이빨’ 중 팔각산 쪽 것의 끝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흘러내려오는 ‘옥계’가 전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곳입니다. 얼음골을 거쳐 온 ‘가천’이 정자 바로 앞에서 저 옥계에 합류합니다. 침수정은 저래서 특출한 명당입니다. 710m봉에서 학소대까지의 하옥북릉 전체 길이는 5.5km 정도입니다. 어른들에 따르면 본래는 저것 전부가 하옥리 북쪽 경계였습니다. 그러나 1983년에 갈모봉 이하를 떼어 영덕으로 넘겨주면서 변동이 생겼습니다. 그럴 때 옛날 하옥리의 8반으로 관리되던 ‘옥련암’마을도 영덕 소속으로 넘겨졌습니다. 하옥 계곡 맨 끝, 향로봉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그 마을입니다. 하옥북릉의 끝점 학소대는 기암절벽이 장관입니다. 그 동쪽 비탈 절벽은 ‘병풍바위’로 통했습니다. 그 건너 침수정 앞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기 때문일 터입니다. 그 서쪽 비탈 또한 온통 바위뿐인 절경입니다. 팔각산 등산로 주차장에서 보면 정말 좋습니다. 거기 서 있는 ‘仙境玉溪’(선경옥계)라는 표석 글귀가 실감됩니다. 저러한 바위 절경은, 팔각산 주차장에서 ‘가천’ 상류로 오르면서 현란하게 이어집니다.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얼음골’ 기암절벽일 것입니다. 그걸 활용한 인공폭포 절벽도 있습니다. 여름철에 얼음이 어는 곳이라 해서 이름을 날리던 얼음골은, 저 인공폭포를 갖춤으로써 지명도를 세계에까지 넓혔다고 합니다. 겨울이면 그게 빙벽폭포가 돼 세계적인 클라이밍 대회가 열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얼음골 휴게소 주인어른은 그 인공폭포 빙벽폭포의 아이디어맨이라고 했습니다. 비올 때 잠깐 생기는 자연 폭포수를 낮잠 자다 보고 인공폭포 아이디어를 냈고, 깜빡 잊고 인공폭포 물 스위치를 꺼지 못했다가 다음날 아침 생각지도 못한 빙벽이 생겨 있는 것을 보고는 인공빙벽을 구상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필자에게 그 못잖게 인상 깊게 들린 것은 그 어른의 달관한 듯한 말씀입니다. 현장을 안내해 주던 그 어른은 󰡒저 강바닥 봐라, 물이 얼마나 깨끗하냐󰡓고 어린애같이 찬탄했습니다. 이런 곳에 사시니 신선 같으시겠다고 했더니 󰡒욕심 없이 살면 다 좋아 보이는 법”이라고 일렀습니다. 그 전날 답사 때는 동행이 아이스콘 사느라 손에 있던 돈 다 털었다고 하자 “다 떨고 가야 가볍지”라고 조크했던 분입니다. 하옥북릉(얼음골 남릉) 등산로를 개발하고 안내판을 손수 갖다 세운 이도 그 어른이라고 했습니다. 은퇴 후 도시에서 귀향해 사는 산 너머 도등기마을 어른도 그 일을 함께 했다고 합니다. 저 찬란한 산줄기의 남과 북에 사는 청송과 포항의 두 토박이 어른이 주인답게 그 땅을 챙기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박종봉 투데이포항 고문)